레거시 키우고 첨단반도체 생산···고품질 화웨이폰에 애플도 백기
韓소재까지 빨아들여 레거시 집중
생산 비중 2027년까지 39%로
한국 웨이퍼 인력 수십명 채용도
스마트폰 등 관련시장도 판도변화
자국 반도체탑재 화웨이 스마트폰
고품질 앞세워 애플판매량 끌어내려
미국은 2019년부터 7㎚(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기에 대한 수출을 규제했다. 중국이 첨단 반도체에 대한 경쟁력을 갖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미국 정부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반도체 장비 규제의 강도를 더 올렸다. 2022년에는 △14㎚ 이하 시스템반도체 △18㎚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등 첨단 칩 제조의 핵심인 자국 반도체 장비의 수출까지 틀어막았다.
중국은 틈새를 파고들었다. 미국과 대적하기 위해 레거시(범용) 반도체를 선택했다. 최첨단 기술을 빠른 속도로 따라잡는 당초 전략에는 제동이 걸린 만큼 레거시 칩에 집중 투자해 영향력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선회한 것이다. 중국의 투자 규모는 천문학적이었고 경쟁력은 수치로도 나타났다. 중국의 대표 반도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회사 SMIC는 지난해 3분기 8인치 웨이퍼를 환산한 기준으로 월 79만 5750장의 생산능력을 확보했다. 시장 둔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년 동기보다 생산능력을 12%나 올렸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중국은 44개 반도체 생산 라인을 운영하고 있는데 현재 22개의 신규 공장도 건설하고 있다. 막대한 투자로 인해 중국의 레거시 반도체 생산능력은 빠르게 늘고 있다. 트렌드포스는 중국 레거시 반도체의 생산능력 비중은 2023년 31%에서 2027년 39%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 주요 반도체 생산국 가운데 비중이 증가한 곳은 중국이 유일하다. 트렌드포스 측은 “SMIC와 화홍그룹이 중국의 레거시 반도체 반등을 이끌 것이고 성숙 공정 공급과잉과 그로 인한 가격 전쟁을 야기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은 반도체용 블랭크 마스크처럼 현재 내재화가 까다로운 소재는 한국 등 이웃 나라에서 공급받고 있다. 동시에 국산화에도 속도를 올리는 일종의 ‘투트랙’ 전략을 치밀하게 고수하고 있다. 반도체 주요 소재나 장비의 내재화 작업을 위해서는 고급 인력의 영입이 핵심이다. 중국이 무차별적으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에서 근무했던 반도체 전문가들을 빼 가려고 하는 이유다. 인재도 확보하고 기술도 얻겠다는 것이다.
반도체 인재 영입의 범위도 다각도다. 웨이퍼 분야는 특히 집중 대상이다. 중국의 한 반도체 소재 회사는 자사 실리콘 웨이퍼의 역량 확대를 위해 우리나라 웨이퍼 회사 출신의 고급 엔지니어 수십 명을 채용했다. 이 회사의 웨이퍼 기술 개발 핵심 인물이 한국인으로 파악된다. 또한 실리콘·실리콘카바이드(SiC) 물질로 구현할 수 있는 반도체 장비 부품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중국 모처에 회사를 설립하고 한국 사람을 총괄 책임자로 앉힌 것으로 전해졌다.
레거시 반도체라고 해서 무시할 문제가 아니다. 당장 스마트폰 등 반도체가 탑재되는 관련 제품 시장에서 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화웨이가 출시한 스마트폰인 ‘메이트 60 프로’가 대표적이다. 이 스마트폰에는 중국 파운드리인 SMIC가 EUV 기기 없이 제조한 7㎚ 프로세서가 탑재됐다.
미국의 규제 속에 고전하던 화웨이가 자체 생산 반도체로 소비자 입맛을 어느 정도 충족한 스마트폰 신제품을 내놓자 판매량이 급증했다. 화웨이의 지난해 4분기 중국 내 스마트폰 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 80%가량 급증한 반면 중국 시장을 장악했던 애플의 판매량은 10% 줄었다. 중국의 일명 ‘애국 소비’도 판매 확대에 영향을 미쳤지만 기본적으로 품질이 어느 수준으로까지는 올라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상황이 급반전되자 자존심 강한 애플마저 백기를 들었다. 애플은 중국 웹사이트를 통해 최신 기종인 아이폰15 시리즈 가격을 500위안(70달러) 인하한다고 발표했다. 브랜드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애플이 할인 판매에 나서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인공지능(AI) 기술의 핵심인 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엔비디아는 미국 정부의 수출 통제로 중국에 최신 GPU를 공급하기 어려워지자 성능을 낮춘 RTX 4090D와 같은 중국 전용 칩을 출시했지만 싸늘한 반응에 애를 먹고 있다. 반면 대체품으로 등장한 화웨이의 어센드 910B는 엔비디아 GPU의 대체재로 주목받으면서 중국 내 주요 인터넷 기업을 대상으로 판매량을 크게 늘리고 있다. 미국 제재가 자국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촉매제가 된 셈이다.
강해령 기자 hr@sedaily.com진동영 기자 jin@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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