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왕자’가 출가수행한 가야불교의 발상지, 하동 칠불사[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경상남도 하동에 자리 잡은 칠불사(七佛寺)를 방문했다. 그곳 총무스님이 건네준 믹스커피를 받아들며, 불현듯 어느 친구가 애송하던 이성복 시인의 ‘그렇게 소중했던가?’ 시구가 머리에 스쳐갔다.
『 버스가 지리산휴게소에서 십분간 쉴 때 /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 잡지나 뒤적이다가 /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안에 털어 넣었지 /그렇게 소중 했던가 /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 했던가…』
나중에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그리 많은데 나는 칠불사에 무엇을 내려놓으려고 왔을까. 주지스님에게 녹차라도 한잔 마실 수 있을까 해서 뵙기를 청했으나 마침 출타 중이어서 총무스님이 응대해 왔다. 칠불사는 오대산 상원사와 더불어 문수보살을 주존(主尊)으로 모시는 ‘지혜의 절’로 통한다. 더구나 지리산은 반야(지혜)봉이 있는 산이어서 지혜에 목마른 정치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계곡 따라 14km, 30여분 정도 올라가면 지리산 800m 고지에 칠불사 일주문과 ‘초의선사 다신탑비(茶神塔碑)’를 만날 수 있다. 올라가는 길 좌우엔 산자락을 따라 녹차밭이 즐비하고 ‘한국의 아름다운 길 쌍계사 10리 벚꽃길’이 펼쳐진다. 겨울이라 나뭇가지들은 앙상하지만 칠불사로 향하는 길은 운치 있었다. 지리산의 제2봉인 반야봉(1732m) 남쪽 해발 800m라 해서 걱정했는데 사찰 입구까지 포장길이 잘 다져있고 경사 또한 크게 가파르지 않았다.
칠불사 창건에 관해선 몇 가지 설화가 전해진다.
과거 낙동강 유역에 터를 잡았던 가락국과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은 아유타국 공주 허황후(허황옥)와의 사이에 10남 2녀를 뒀다. 장남 거등(居登)은 왕위를 계승했고 둘째와 셋째 왕자는 허황후의 뜻에 따라 어머니의 성을 이어받아 김해 허씨(許氏)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외숙인 장유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정진했다. 그렇게 6년을 보내고, 왕자 모두 하동칠불(河東七佛)로 성불(成佛)하였다 해서 ‘칠불암’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한다. 칠불사 대웅전 석가모니불 오른쪽 벽에는 성불한 일곱 왕자를 형상화한 칠불이 있다. 이 절은 김해에 있는 은하사, 장유사와 함께 가야불교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또 지리산은 문수보살(七佛祖師)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칠불암이라고 하였다는 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다만 일곱 왕자의 성불 창건설이 주가 되고 있다. 통일신라의 거문고 명인인 옥보고(玉寶高)는 이 절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공부해 30곡(아악)을 지어 전했다고 해서 ‘신라 음악의 요람지’라는 상징성도 있다.
절 입구에 당도하니 높은 계단 위에 세워진 누각(보설루)에 ‘동국제일선원’이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통일신라 이후 칠불사는 수도승들의 참선도량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승병을 이끈 서산대사 등 이름 높은 고승들도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대웅전 뒤편 숲길 깊숙한 곳, 먼 옛날 가락국 일곱 왕자가 수행했던 ‘운상선원’이 있다. 마침 동안거(冬安居)에 돌입한 여러 스님들이 수행 중이라 출입할 수는 없었다. 이 건물은 지리산에서도 남쪽으로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최고 명당자리인 듯하다.
칠불사는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다 1948년 여순사건으로 전소됐다. 이후 30여년 폐허로 방치되다가 덕망 있고 존경받고 있었던 제월통광스님이 1978년부터 15년간 걸쳐 성지복원을 위한 불사를 진행했다. 전국에서 불자들이 관심을 보였고 김해 김씨와 허씨 문중도 물심양면으로 도와 칠불사를 복원할 수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야당 시절 이곳을 찾았다. 통광스님이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많은 정치인들이 찾는 절이다.
불이문 역할을 하고 있는 보설루 1층 종무소를 지나 계단에 오르면 절의 각 건물들이 아담한 마당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좌측에는 복원공사가 마무리되어 가는 아자방, 정면에 대웅전, 대웅전 오른편엔 문수전, 설선당, 요사채 등이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다.
보설루와 맞닿은 오른쪽엔 종각인 원음각과 그 옆으로 ‘칠불사 전래석’이라는 이름으로 수석들이 전시돼 있다. 안내문에 의하면 칠불사는 500년 수석 역사를 간직하고 있단다. 도응 주지스님이 이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주차장 앞마당에는 ‘선다원’과 템플스테이를 위한 3층 규모의 커다란 숙소가 있다. 그 아래에는 연못인 ‘영지(影池)’가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칠불사의 여러 건물 가운데서도 아자방(亞字房)은 특별치 눈여겨볼 만하다. 스님들이 참선하는 공간(선방)인데, 방 전체에 구들을 놓아 만든 온돌방이다. 내부 설계가 독특한데 스님들이 수행하는 자리인 방 안 네 귀퉁이는 바닥면보다 한 단 높게 돼 있어 전체적인 구조가 한자 ‘아(亞)’자와 닮았다.
9세기 말 신라 효공왕 때 ‘구들도사’로 불리던 담공화상(曇空和尙)이 축조한 것으로, 불을 한번 때면 온기가 방바닥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고르게 퍼지고 100일간 지속된다는 불가사의를 지닌 방으로 중국 당나라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건축물 역사에서 특별한 인물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아자방은 1948년 불에 타 사라졌다가 1983년 복원됐고 2015년부터 재복원 공사가 진행되면서 일반인들의 내부 관람은 통제됐다. 다행히 필자가 방문했을 때 총무스님의 안내로 깔끔하게 복원되어 있는 아(亞)자형 선방 내부와 조선시대 아궁이 시설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다만 복원을 마치더라도 한 번 불을 때면 100일간 온기가 지속될 수 있을진 장담하기 어려운 듯했다(구들도사가 부활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칠불사 아자방 온돌은 전통 온돌문화와 선종 사찰의 선방이 결합된 독특한 문화유산이고, 희소성이 매우 높은 사례라고 한다. 방 구조의 탁월한 과학성을 인정받아 1979년 세계건축협회에서 펴낸 ‘세계건축사전’에 수록됐고 지난해엔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등과 활발한 교류를 했던 초의대선사가 칠불사 아자방에 머무르며 다신전(茶神傳), 동다송(東茶頌) 등을 지었다고 한다. 차 재배의 실무와, 다례 등을 세밀하게 기술한 서적이다. 오늘에 와선 한국 차(茶) 문화·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들이다. 하동은 우리나라 야생차의 시배지(처음 심어 가꾼 곳)이기도 하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수석과 차의 정신을 통해 철학의 위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허황후와 그의 오빠 장유화상은 인도 아유타국 사람으로 가야에 불교를 전파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해 은하사의 장유화상 영정에는 월지국에서 온 인물이라고 표기돼 있어 아유타국이 어디인지, 월지국이 어디인지 논란이 있다.
최근 남부 인도 타밀나두주(州)의 주도인 첸나이에 한국의 현대자동차, 삼성전자가 들어가 있고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곳 지방어인 타밀어가 우리말과 유사성이 많고 인도에선 한국과 가까운 지역이라서(배 항로와 연관해서) 장유화상을 첸나이와 연관짓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미 2000여년 전에 인도불교가 가야불교로, 가야불교가 금관가야를 넘어 경상도 동쪽 끝자락 지리산까지 확산됐다는 사실이다. 그 중심에 칠불사가 있었다.
수로왕과 왕비는 출가한 일곱 왕자가 그리워 칠불사을 찾았지만 장유화상은 “왕자들은 이미 출가하여 수도하는 몸이라 결코 상면할 수 없다. 꼭 보고 싶으면 절 밑에 연못을 만들어 물속을 보면 된다”고 했다. 그 말에 따라 수로왕 부부는 연못을 만들어 들여다봤더니 거기에 일곱 아들의 그림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후 그림자 영(影)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곳 연못을 영지(影池)라 부르게 됐다.
사찰 인근엔 범왕(凡王)마을이 있는데, 수로왕이 출가한 왕자들을 만나기 위해 임시 궁궐을 짓고 머무른 역사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대비(大妃)마을 역시 허황후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머무른 곳이었다는 유래가 있다. 이래저래 칠불사가 가야불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로 거론된다.
불교의 발생지이자 세계 최대 인구를 가진 인도와 2000여 년 전부터 불교를 매개로 접점이 있었다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 신화적 요소로 치부해버리기보다는 실체적 사실로서 의미를 증폭시켜 나가는 것은 어떨까.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시조모 허황후를 통해 인도와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칠불사를 떠나며 해봤다.
글·사진 = ㈜헤럴드 정용식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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