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불광천 청둥오리의 간절함에 굴복하다[이다의 도시관찰일기]

기자 2024. 1. 1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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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따끈 내 붕어빵
꽥꽥! 쳐다보는 눈빛들
결국 ‘삥’ 당해버린 나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은평구에는 불광천이 있다. 불광천은 북한산 자락에서 시작해 콘크리트 도로로 덮인 복개 구간을 지나 응암역에서 한강까지 이어지는 도시 하천이다. 옛날에는 비가 와야 물이 겨우 흘러 생물이 거의 살지 못하는 하천이었다고 하는데 복원과 정비를 거쳐 지금은 물고기와 새들이 많이 살고 있다.

불광천의 주요 주민은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왜가리, 중대백로, 쇠백로, 해오라기, 청둥집오리(청둥오리와 집오리의 잡종), 민물가마우지 등이 있다. 계절에 따라서 알락할미새, 쇠오리, 알락오리, 물닭도 찾아온다. 어디에나 있는 참새와 까치, 직박구리, 비둘기도 당연히 있다. 이 중 가장 사랑받는 것은 역시 전 국민이 다 아는 청둥오리다. 아무리 자연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청록색 머리에 흰색의 목 띠가 있는 청둥오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청둥오리는 원래 철새지만 요즘은 한 군데에 정착해서 사는 녀석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불광천에는 사시사철 청둥오리가 있다. 겨울에는 아직 철새 생활을 고집하는 청둥오리들이 찾아와 개체 수가 세 배 이상 늘어난다. 불광천에는 이런 오리들에게 밥을 주는 어르신들이 몇분 계시다. 커다란 강냉이 봉지를 가져와서 신나게 뿌리면 청둥오리들이 전투적으로 모여든다. 그리고 하나라도 받아먹으려고 난리가 난다.

가방 속에서 봉지를 꺼내자마자
발밑에 달려든 스무마리 암컷들
최종 승자는 끝까지 남은 ‘반들이’

도심 속 자연이 만든 진귀한 풍경
매일 새롭게 펼쳐지는 콘텐츠들
일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자

청둥오리와 집오리가 교배해서 낳은 청둥집오리들은 야생오리들보다 덩치가 훨씬 커서, 이럴 때 유리하다. 큰 소리로 꽥꽥 울고 다른 오리들을 부리로 찧으며 협박한다. 하지만 밥 주는 어르신들은 누군 먹고 누군 못 먹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아서, 깡패오리들을 피해서 다른 오리들에게 열심히 밥을 준다. 어르신들은 밥을 주는 동안 오리들과 함께 대화도 나눈다.

“넌 많이 먹었어! 친구한테 양보해야지”, “꽥!”, “작은 놈 어서 이리 와!”, “꽥”

활기찬 오리들의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된다. 야생동물들에게 밥을 주는 것은 금지돼 있다. 그렇다고 민원을 넣기도 마음에 걸린다. 먹을 게 별로 없는 겨울에는 괜찮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저런 소일거리를 즐거움으로 삼으시는 어르신들한테 너무한 일인 듯싶어서다.

생각해보면 물새들은 먹을 것이 많은 봄, 여름, 가을에는 인간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인간에게 먹이를 받아먹는 것도 종에 따라 차이가 있다. 똑같이 물가에 사는 오릿과라고 해도 흰뺨검둥오리나 쇠오리, 알락오리는 인간에게 잘 다가오지 않는다. 먹이를 준다고 해도 멀리서 “인간이 나에게 좋은 짓을 할 리가 없어!” 하는 단호한 표정으로 의심한다.

왜가리나 중대백로, 해오라기 같은 육식파 녀석들도 당연히 오지 않는다. “물고기가 맛있지, 뻥튀기가 뭐가 맛있다고 청둥오리들은 지조도 없이 저러나”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같은 청둥오리 중에서도 암컷이 수컷보다 훨씬 먹이에 적극적으로 달려든다. 겨울철은 청둥오리들이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는 시즌이니 당연하다. 청둥오리와 집오리의 잡종인 청둥집오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가장 적극적이다. 사람의 바로 손 아래까지 다가와 손에서 먹이를 받아먹는다.

겨울철에 사람이 물가에 서 있으면 청둥오리들이 몰려간다. 처음엔 무조건 먹이를 줄 거로 생각해서 그럴 거라 여겼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겐 몰려가고, 어떤 사람은 그냥 무시한다. 청둥오리들은 뭘 보고 저 사람이 나에게 밥 줄 사람이라는 것을 알까?

청둥오리들은 일단 봉지를 들고 있는 사람에겐 무조건 간다. 그런데 봉지가 아니라 메고 다니는 가방이라면 가지 않는다. 청둥오리들은 가방과 봉지를 구분할 줄 안다. 가방에서 봉지가 나오면 얼른 몰려든다. 가방에서 나오는 것을 구분할 줄도 아는 것이다. 먹이가 아니라 책이나 휴대폰이 나오면 절대로 몰려들지 않는다.

어느 날은 응암역 근처에서 붕어빵을 샀다. 붕어빵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라 한 봉지를 사는 데 거의 20분을 기다렸다. 이 붕어빵을 물가에 앉아 햇볕을 쬐며 먹으면 얼마나 따뜻하고 맛있을까! 서둘러 불광천으로 갔다. 천변에 앉아 붕어빵 봉지를 꺼내자 갑자기 청둥오리들이 나를 향해 몰려왔다. 어림잡아도 스무 마리가 넘는다.

“아니! 이거 너희 줄 거 아니야!”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다. 어느새 발밑까지 몰려와서 “빨리 내놔” 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청둥오리 수컷은 한 마리도 없고, 대부분 청둥오리 암컷에 흰뺨검둥오리도 한 마리 섞여 있다. 진한 밤색의 눈동자들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너희 팥 안 먹잖아! 이거 너희 먹을 거 아니야! 나도 두 개밖에 없어!” 다가온 녀석들이 한두 마리면 인심을 쓸 수도 있겠지만 오병이어의 기적도 아니고 이 많은 청둥오리를 다 먹일 수는 없다.

나의 단호한 대처에 몇몇 오리가 포기하고 돌아간다. 그런데 한 마리만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반들반들한 머리를 가진 암컷이다. 성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동그란 머리가 작다. 저 매끈해 보이는 배를 한 번만 만져보면 얼마나 좋을까!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눈앞의 오리에 매혹되었다. 혹시 붕어빵을 주면 그런 기회가 올 수 있을까?

녀석의 간절한 눈빛에 굴복하고 말았다. 설탕이 들어 있을 팥앙금은 최대한 내 입으로 발라내고 밀가루 부분만 남겼다. 그리고 멀리 던져주려고 손을 내밀자마자 발밑에 있던 녀석이 힘껏 점프하며 손에서 붕어빵을 가로채 갔다! 순식간에 입안으로 집어넣더니 다시 나를 빤히 쳐다본다. “더 내놔” 이게 바로 ‘삥 뜯기’라는 거구나…. 쫓기는 기분에 서둘러 일어났다. 나는 붕어빵도 잃고 앉을 자리도 잃었다. 그 후로 천변에서 함부로 뭔가 먹지 않는다.

이런 일화들을 나는 매일 자연관찰일기장에 기록한다. 작년에는 1년의 기록들을 모아 <이다의 자연관찰일기>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자연관찰일기(nature journaling)란 미국의 화가이자 환경운동가인 클레어 워커 레슬리와 찰스 E 로스가 주창한 운동으로 ‘지금 내 주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 주변을 관찰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행위를 말한다.

거창한 곳이나 깊은 숲 한복판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흔히 서울 같은 대도시에는 자연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자연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간판 조명에 붙은 풀잎 모양의 나방이나, 돌 틈에서 피어난 해바라기 같은 것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찾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열심히 관찰하고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당장 그릴 수 없을 때는 사진으로 찍어온 후 집에 돌아와 그날의 날씨, 온도와 함께 기록을 남긴다. 그렇게 자연관찰일기를 쓰며 바라본 세상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보는 것보다 놀랍고 재미있는 것들로 가득했다.

불광천의 오리들은 인스타그램의 인플루언서들 못지않게 ‘핫’한 존재였고, 까치들과 까마귀들이 영역 다툼을 벌이는 치열함은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못지않았다. 나는 왜가리와 중대백로의 열혈 팔로어이기도 하다. 그들이 매일 눈앞에 보여주는 새 콘텐츠를 본다. 우리 주변에는 늘 사건이 일어나고 변화가 있다. 보려고만 하면 언제든 쉽게 볼 수 있다.

올해는 이 시선을 도시 전체로 넓혀보려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은평구, 크게는 서울을 관찰할 것이다. 도시 안의 자연과 사람, 때때론 도시 자체가 관찰대상이 될 것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뉴스를 볼 때마다 인류애를 잃고 삶이 고달프게만 느껴진다. 세상에는 오직 혐오와 이기심만이 힘을 얻고 세를 불리는 것 같다. 지구는 당장 기후 위기로 망해버릴 것 같고 세상의 거대한 흐름 속에 나라는 존재는 소리 소문도 없이 금방 사라질 것 같다. 그럴 때 나는 한없이 무력하고 초라하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 걸으면서 주변을 관찰하면 이런 무력감이 조금 옅어진다. 관찰하는 것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내가 지금 존재하는 곳을 자세히 보고 관심을 가지면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직접 바라보고 느끼는 주변의 세상은 그리 삭막하지 않다. 매번 놀랍고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펼쳐진다. 모니터 너머가 아니라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걷고 호흡하면서 세상을 탐방하듯이 조금씩 알아가고 싶다. 자, 이제 문밖으로 나가는 것부터 시작이다.

▶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저서로는 <이다의 자연관찰일기> <내 손으로 치앙마이><걸스토크> 등이 있다. 그림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는 것이 소망이다.

이다|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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