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곁의 ‘보조장치’는 누구인가요?
삐삐언니의 마음책방은? 책을 많이 읽으면 똑똑해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새로 알게 된 것보다 잊어버리는 게 더 많기 때문에 지식 총량이 늘어나는 건 잘 모르겠지만 이해력이 좋아지는 건 분명합니다. 나를 위로하고 타인을 격려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지요. 좀더 씩씩하게 살아가고 싶은 삐삐언니가 책을 통해 마음 근육을 키우는 과정을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몇 년 전 혼자서 도보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시골 마을 길을 한 달 넘게 걸으며 맛있는 것도 먹고 새로운 친구들도 만났습니다. 매일 밤 낯선 마을에 거처를 정해야 하는 고단한 길 위의 삶이었지만, 가야 할 길 분명한 화살표 같은 날들이 주는 만족감이 쌓이다 보니, 스스로 나 꽤 멋진 사람 같네, 하며 태어나고 나서 처음으로 가슴을 쫙 폈습니다.
햇살이 이슬을 거두어가고 바람이 가볍게 이마를 스치는 어느 신선한 아침이었습니다. 나 지금 참 행복하구나, 중얼거리다가 조금 불안해졌습니다. 행복은 위태로운 동그라미 같아서 중심을 0.1mm라도 놓치면 이지러지고 말죠. 지금처럼 완벽하게 동그란 느낌과 정반대 상태, 즉 불행할 때는 언제일까? 물음표가 이어졌어요.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런 풍경을 볼 수 없다면 어떻게 하지? 시력을 잃는다는 게 가장 큰 불행일 것 같았어요. 아니지, 눈이 안 보여도 지금처럼 길을 걸을 수 있다면 덜 불행하겠지? 실험 삼아 눈을 감고 발을 내디뎠습니다. 곧게 뻗은 길이었지만, 스무 걸음도 못 가고 오솔길 옆 풀섶으로 처박혔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가와우치 아리오 지음·김영현 옮김, 다다서재)를 읽다가, 눈 감고 걸었던 그 순간이 떠올랐어요. 이 책에 등장하는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는 시라토리 겐지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던 그는 맹학교를 졸업하고 마사지사가 되었지요.
시라토리는 어느 날 호감을 느끼던 여성(눈이 보이는)과 미술관에서 데이트를 하게 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해부도 전시가 열리고 있었어요. 마사지가 업(業)인 시라토리는 당연히 근육, 뼈, 힘줄의 움직임과 모양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설명을 들으면서 다빈치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빈치의 스케치가 근대 의학의 주춧돌”이 되었듯, 이후 시라토리의 인생도 전환점을 맞습니다.
보고 싶은 전시가 있으면 무작정 미술관에 전화를 걸었어요. “저는 전맹이지만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안내를 해주면서 작품을 말로 설명해주었으면 합니다. 잠깐이라도 상관없으니 부탁드립니다.”
시라토리의 무작정 에스오에스(SOS)는 미토 예술관 직원 마이티와 연결되고, 마이티는 친구이자 작가인 가와우치 아리오를 또 연결하고…. 어찌어찌 인연이 얽힌 시라토리와 그 친구들은 일본의 여러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예술을 ‘보게’ 됩니다.
시라토리가 친구들과 미술관을 즐기는 방법은 이러합니다. 시라토니는 안내를 맡은 사람의 팔꿈치를 살짝 잡고 반 발짝 뒤에서 걸어가고, 친구들은 작품을 보며 자기가 발견한 것을 소상하게 이야기해요. 시라토리는 엇나가는 관찰, 미심쩍은 해석을 즐깁니다. “혼란이 재미있으니까.” 오히려 작품 배경에 정통한 사람이 들려주는 잘 짜인 설명은 싫어하죠. “일직선으로 정답까지 나아가서 따분해”
시라토리와 함께 처음 미술관에 다녀오고 난 뒤 가와우치는 이렇게 썼어요. “마치 서로의 몸이 서로에게 보조장치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작품에 관해 이야기해주면서 안전하게 걷도록 해주는 장치. 시라토리씨는 내 눈의 해상도를 높여주고 작품과 관계가 깊어지도록 해주는 장치. 그처럼 서로 몸의 기능을 확장하면서 연결되는 것도 그날의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사실,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시각장애에 대해 눈이 보인다/안 보인다, 이분법으로 생각하기 쉬워요. 그러나 시라토리처럼 선천적인 경우도 있고 질병이나 사고로 시력을 잃기도 해요. 정도에 따라 앞이 온통 캄캄한 세계를 살기도 하고 어둡고 환한 명도를 감지하는 사람도 있고, 특정 색깔의 빛을 볼 수 있는 이도 있어요. 최근 국내 첫 개인전을 열었던 멕시코 작가 마누엘 솔라노는 26살에 후천성면역결핍증(HIV)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었어요. 그는 캔버스 위에 못과 핀, 줄을 걸어두고 머릿속 기억에 따라 촉각으로 작품을 완성해냅니다.
시라토리는 색과 모양을 시각적으로 인지한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막연한 이미지만 떠올릴 수 있어요. 비장애인에게는 익숙한 에드워드 호퍼나 반 고흐의 그림을 보이는 사람처럼 감상하는 게 오히려 어렵습니다. 시라토리는 “예술은 시험처럼 정답률이 몇 퍼센트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정답률을 원하면 결국은 ‘시각의 기억’을 얼마나 썼느냐는 얘기가 될 수밖에 없어. 나한테 그런 건 하나도 재미없어.”
가와우치는 이렇게 씁니다. “지금 내가 눈앞에 두고 있는 컵을 시라토리씨는 머릿속에서 같은 크기, 색, 형태로 재현하지 못한다. 그는 전혀 다른 상상력을 써서 컵을 ‘본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눈이 보이는 사람’ 또한 시라토리씨가 ‘보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는 꼬꼬마 때부터 눈이 나빴습니다. 물론 안경을 쓰면 되지만 그래도 최고 교정시력이 좌우 0.8 정도입니다. 그러니 ‘시력 1.0 이상’의 세상을 몰라요. 나는 저 앞에 버스가 다가오면 일단 냅다 뛰고 봅니다만, ‘1.5의 세상’에 살고 있는 제 친구는 아주 멀리서도 버스 번호를 식별할 수 있어서 느긋하게 움직입니다. 그 친구는 다소 냉소적인 구석이 있는데, 시력이 너무 좋아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한 적 있습니다. 나는 거울 속 얼굴의 주름을 자세히 볼 수 없지만 그는 미세한 변화까지 알아챌 테니까요.
좀더 넓혀 보자면, 눈이 잘 보이는 사람들 역시 제각각 자기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건을 목격하고도 증언과 기억이 달라 다양한 해석을 낳기도 하고 오해와 불신의 벽을 높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는 보이는 친구들과 예술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보조장치가 되어 대화의 다리를 즐겁게 건너며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듭니다. 시라토리는 “생선 가시를 깨끗하게 발라 먹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과연 생선을 깔끔하게 먹지 못하는 게 반드시 열등한 일일까요. 시라토리의 시각장애인 친구들 중엔 아무리 연습해도 마사지를 잘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빨래를 제대로 널 수 없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애초에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아니잖아. 사실 마사지든 빨래 널기든 잘 못해도 전혀 상관 없다는 걸 깨달았어.”
예술을 ‘보기’ 이전 시라토리는 집에 혼자 있을 때 항상 전깃불을 켰다고 해요. “(비장애인들에게) 내가 확실히 여기에 있다는 걸 어필하고 싶어서” “전맹이지만 똑같이 생활하고 있다는 느낌”을 원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언젠가부터 불을 켜지 않아요. “전맹이 불을 켜지 않는 건 당연하잖아. 그래도 상관없잖아, 라고 생각이 바뀌었어, 뭔가 그런 부분에서도 마음이 단단해졌구나 싶어.”
앞에서 내가 행복은 위태로운 동그라미 같다고 했잖아요. 어, 하다 보면 곧 모서리가 생겨나는 아슬아슬한 균형점. 그런데 이 책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동그라미 하나하나는 긴장의 연속이지만 사슬처럼 연이어 펼쳐져 있는 게 아닐까. 결국 포인트는 넘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 저마다 주어진 위험한 곡예의 길을 함께 가는 것일지 몰라.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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