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마켓 ‘소주친구’가 건넨 것은···보고 듣기 괴로운 세상에도 온기는 있다[책과 삶]

임지선 기자 2024. 1. 1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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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정진영 지음 | 무블 | 332쪽 | 1만6800
정진영 첫 소설집…단편 12편 묶어
동료가 아파도 못 챙기는 콜센터 등
부동산·가상화폐·노동·학교폭력 다뤄
정진영 작가가 12편의 단편소설을 모은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를 출간했다. 사진은 지난해 9월 인터뷰 사진. 이준헌 기자

동네 중고거래 앱인 당근마켓에 뜬 한 줄의 메시지.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실 분 찾습니다.”

중소기업의 잘나가는 임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명함이 사라지니 인연도 사라졌다. 가족과도 멀어졌다. 오랜만에 연락한 딸은 ‘아이폰 13 미니’를 사달라고 한다. 소주 두 병을 마시고선 당근마켓을 뒤졌다. 아이폰 13 미니의 중고 시세는 60만~80만원이었다. 20만원짜리가 눈에 보였다. 계좌 이체 후 문고리거래로 아이폰 13 미니를 받았다. 그런데 전원이 안 켜졌다. 판매자는 ‘목업폰이니 당연히 전원이 안 켜지죠’라고 했다. 목업폰은 2만~3만원이면 살 수 있는 모형이었다. 사기 아니냐고 항변했다. 판매자는 ‘목업폰’ ‘환불불가’라고 명시했다며 오히려 ‘진상’ 취급했다. 다시 당근마켓을 보니 시세 60만~80만원 글 사이에서 ‘20만원’이라고 올린 게시물은 무려 8개월 전 것이었다. “8개월 동안 기다린 끝에 이 말도 안 되는 거래를 성사한 뚝심! 너는 그 돈을 먹을 자격이 있는 놈이다. 인정한다.” 그때 당근마켓에서 소주 친구를 구하는 글을 본다.

<침묵주의보> <젠가> 등 장편소설만 발표해온 정진영 작가가 첫 소설집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를 냈다. 12편의 단편이 담긴 소설집은 중고거래, 실직, 학교폭력과 따돌림, 부동산 ‘영끌’, 코인 투자 등 우리 시대 씁쓸한 모습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우울하지만은 않다. 사람 사이 자그마한 희망의 씨앗도 슬며시 보여준다.

‘숨바꼭질’은 자전적 경험을 담았다. 광화문에 있는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주인공은 회사와 가까운, 30분쯤은 걸어 올라가야 하는 언덕배기에서 원룸을 찾았다. 전세반환보증금 보험에 가입할 수 없는 전세 5000만원짜리 원룸이었다. 같은 회사 직원의 신혼집에서 그는 입맛이 뚝 떨어진다.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는 실거래 최저가가 4억8500만원이었다. 와인잔을 들고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 살고 싶어진다. 그는 에어컨 구매를 참고, 이웃집 와이파이에 ‘무임승차’한다. 예·적금을 깨서 4000만원을 비트코인에 투자한다. 정부의 대출 규제가 시작되자 현금이 더 필요했다. 비트코인을 팔고 알트코인으로 갈아탔지만 며칠 만에 곤두박질쳤다. 그사이 전셋값이 올랐고 통장은 텅 비었다. 그에게 몇년간의 서울살이는 “마치 이길 수 없는 숨바꼭질의 술래가 돼 아무런 소득이 없이 뛰어다닌 꼴”이었다. 이사 가려고 하자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던 건물주는 세입자가 안 구해진다며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았고 주인공은 이사 갈 집의 계약금을 날린다. 최근 몇년간 부동산 가격 급등세와 대출 규제, 가상통화의 급등락 이슈를 고스란히 담은 이 단편은 흡입력이 강하다.

경기권의 어느 도시를 상징하는 고진시에 관한 단편 ‘동상이몽’은 같은 지역에서도 집값을 둘러싸고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아귀다툼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수도권에 2억~3억원짜리 아파트가 어디 있느냐는 추궁에 “고진 이런 데 있다”고 한 어느 대선 후보의 발언. 고진시민연합은 당사에 몰려가 항의 시위를 한다. 이들은 저녁 자리에 모여 고진시를 깎아내린 대선 후보를 욕하면서 고진시 안에서도 ‘구분 짓기’를 한다. 수원의 광교처럼 브랜드화된 고진시의 ‘태산’. 어느 주민은 고진시가 아니라 꼭 태산에 산다고 말한다. 기반시설이 그쪽으로만 몰려서 마음이 불편한 강촌동 주민, 태산으로 편입되면 아파트 가격이 오르니 아이 초등학교도 태산으로 보내고 싶어 하는 강하동 주민, 재건축을 앞두고 분양가상한제에 걸린다며 태산 편입에 반대하는 또 다른 강하동 주민. 브랜드가 되어버린 ‘태산’을 둘러싼 말다툼은 커진다. 옆자리 손님은 “없는 것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아주 지랄들을 한다!”라고 외친다.

소설 속 여러 장면은 뉴스에서 보고, 주변에서 듣고, 지금 여기서 시민들이 겪는 이야기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소설로 읽는 건 익숙하면서도 낯선 일이다. 멀찍이 떨어져서 외국인의 시선으로 마주하는 느낌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깨달음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동시대 문학이고, 이 소설들의 미덕이다.

정진영 작가는 전화 인터뷰에서 “소설이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사실을 넘어, 사건 너머에 있는 현상은 기사보다 소설이 더 깊이 다룰 수 있지 않나”라고 했다. 기자 출신인 그는 “소설이 저널리즘 역할도 한다”고 했다.

단편 12편은 작가의 전작 장편 분위기와 달리 사람 사이의 온기를 품고 있다. 당근마켓을 소재로 한 ‘징검다리’에서도 주인공은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얻어먹기 위해 모르는 사람과 마주한다. 삼겹살이 구워지는 불판 앞에서 만난 40대 남자는 자신이 폐암 2기라는 사실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털어놓는다. “저를 전혀 모르는 분을 붙잡고 딸에게 제 상태를 알릴 연습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잠시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선 돌아오지 않는 사이 ‘또 사기를 당했나 싶어’ 기분이 나빠지려는데 남자가 나타난다. 징검다리가 되고 싶다며 자신의 딸이 지금은 쓰지 않는 아이폰 13 미니 중고폰을 건네준다. 씁쓸함에서 시작한 소설은 따스하게 끝맺는다.

콜센터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그린 ‘안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임금 노동현실에 내몰린 여성 노동자들에게 있을 법한 이야기, 느낄 법한 감정들을 세밀하게 다룬 작품이다.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진 경희 언니를 두고도 상담 전화를 받아야 하는 현실에 분노해 윤하는 콜센터 노조를 만든다. “누군가는 나서야 하지만 그게 굳이 나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나’는 외면한다. 윤하는 노조 결성을 이유로 해고당하고, 나는 성추행을 당한 뒤 말도 못하고 내쫓긴다. 나는 영산강 자전거길을 달려 목포에 있는 윤하를 만나러 간다. 연락하기를 주저했지만 반갑게 맞아주는 윤하와 내가 통화한 대목에선 괜히 눈물이 난다. 작가는 “노동담당 기자를 2년 넘게 하면서 콜센터에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일들 이야기를 들었다. 한번쯤 다루고 싶었다”며 “다루되 너무 무겁지 않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두 여성이 주인공인 ‘안부’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남성 작가의 작품인가 싶을 정도로 여성 인물이 살아 있다. 작가는 배우자인 배우 박준면 이야기를 꺼냈다. “소설을 쓰고 가장 먼저 보여줘요. 정말 독하게 말해요. 칭찬을 한번 안 해요. 대본을 30년이나 봤으니 눈이 정확해요.”

정진영은 이미 장편소설 9편을 낸 작가다. 그의 표현대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무명하지도 않다’. 신춘문예 당선이나 문학상을 받지 않은 채 책을 내고 소설가의 길을 걷고 있는 정진영은 작가의 말에서 “첫 소설집을 보니 마치 신인으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 좋은 착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소설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몰입하면서 ‘이게 맞아. 이게 우리 이야기였지’라고 환기되는 효과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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