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우주의 한 울림이다

한겨레 2024. 1. 19.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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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다산(茶山)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애독한다는 젊은이다. 자기 아우가 잔뜩 어질러놓은 방을 치운다며 청소 도구를 들고 가는데 형색이 겨우 생명을 부지하는 사람처럼 고단하고 초췌하다. 얼핏 보아도 감당 못할 짐을 지고 비틀거리는 사람이다. 까닭을 알아보니 목민심서 본문의 “백성을 사랑할 수 있다”(可愛民)를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必愛民)로 잘못 읽은 거다. 필(必)과 가(可)는 완전 다른 말이다.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은 그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지만 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파리한 안색으로 동생 방을 향하던 청년의 뒷모습이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한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가 자기한테 지운 짐 때문에 고단하고 초췌한 인생을 겨워하고 있는가? 청년이 다산(茶山)을 애독했다니 하는 말인데, 지금이라도 필(必)을 지우고 그 자리를 가(可)로 채우는 것이 의필고아(意必固我)가 없으셨다는 공자의 후손답게 사는 길 아니겠는가? 할 수 있는 일이면 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면 하지 않기다. 스스로 속지 마라. 네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네 머릿속에나 있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전봇대 같은 나무를 옮겨 심는다. 가지들이 보이지 않아 통나무를 땅에 묻는 것 같다. 그래도 뿌리들이 하얗게 있는 걸 보면 생나무인 건 분명하다. 저렇게 옮겨 심어도 살까? 생각하는데 누가 나무에 흰 물감으로 무늬를 그려 넣는다. 연병장에 도열한 병사들처럼 상하좌우로 질서가 정연하다. 무늬는 생명의 겉모습이다. 살아있는 것들마다 저보다 큰 무늬 속에 있는 저보다 작은 무늬로 구성된 무늬다. 그것도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무늬가 아니라 엄정한 질서를 갖춘 수학적 무늬다. 그래서 하나만 일그러져도 전체가 무너진다. …여기까지가 기억에 남아있고 언제 어떻게 꿈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곁에서 효선이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는데 제목이 “우주는 진동”이다. 한 남자가 크고 작은 싱잉볼을 울리며 강의하고 있다. 맞다. 우주 진동이 꼴로 나타나면 삼라만상이다. 인간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정밀하게 나타나는 우주진동의 한 무늬가 바로 너다. 걱정할 무엇도 없다.

픽사베이

만화에 나오는 산적마냥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장총으로 아무의 가슴을 겨누어 한 방 갈긴다. 가슴에 구멍이 나며 나무토막처럼 앞으로 쓰러진다.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서 뭐라고 중얼거린다. 어수선한 일들이 이어졌지만 깨고 나니 모두 기억에서 지워졌다. 난데없이, 아포리즘 하나면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고 모든 일이 해결된다는 말끝에 이런 말풍선이 허공에 떠오른다. “역사는 아픔을 낳고 여인은 아이를 낳고.” 그렇다, 피투성이 전쟁마당에서도 태어나는 것이 아이들 아닌가? 역사와 아픔이 먼저고 여인과 아이가 나중이라 다행이고 희망이다. …어제 읽은 틱낫한의 문장 하나가 이런 꿈으로 나타난 것 같다. “그것은 마치 물결과 물 같다. 물결을 보면 그것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게 보인다. 물결 하나는 높을 수도 있고 낮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물결이 물로 되어있다. 물이 물결의 바탕이다. 물결은 물결이면서 또한 물이기도 하다. 물결에는 시작과 끝, 높음과 낮음, 큼과 작음이 있지만 물에는 시작도 끝도, 높음도 낮음도, 큼도 작음도 없다. 물결이 이를 알고 이해한다면 온갖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사람이 제 본성을 깨치면 그게 곧 열반이다.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비슷한데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지금 그려지고 있는 그림이다. 나긋나긋한 비단 화폭이 상하좌우로 가없이 펄럭인다. 수많은 네모 칸을 온갖 색깔로 채우다가 칸을 다 채우지 못한 채 다음 칸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돌연 비단 폭이 시골 예배당 벽으로 바뀌면서 중학생 아이들이 중구난방으로 벽화를 그린다. 어지럽다 싶은데 문장 하나 도장 찍듯 나타난다. “우리에게 사별(死別)은 없다. 왜냐하면…” 여기까지 읽다가 꿈을 벗는다. 꿈과 현실의 문턱에서 사별이 없는 까닭을 생각한다. 누가 죽으면 따라서 죽겠다는 말인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자 답이 선명해진다. 아니다, 우리에게 사별이 없는 까닭은 죽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하자, 우리가 틱낫한이 말하는 궁극 차원(ultimate dimension)을 지향하며 역사 차원(historical dimension)을 살지만 동시에 역사 차원을 경험하는 궁극 차원의 존재인 것을. 물에서 나와 저만의 춤을 추다가 물로 돌아가는 물결이지만 실인즉 온갖 물결로 춤추고 있는 물인 것을. “바다에 밀물과 썰물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바다는 바다다.”(반 고흐).

글 이현주 목사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배움터 촌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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