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꼬꼬무' 1978년 KAL기 격추사건…1983년 격추사건에 가려진 이유는?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KAL기는 왜 격추되었나.
18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격추의 시대 - 1978 어느 생존자의 기억'이라는 부제로 1978년 발생한 KAL기 격추 사건을 조명했다.
지난 1978년 4월 20일, 프랑스 파리에 사는 박춘길 씨 가족은 서울행 KAL 902편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창 밖의 구름을 구경하던 그의 가족들 시야에 다른 비행기가 보였다.
보통의 비행기와 다른 모습의 비행 물체 등장에 승객들은 신기해했다. 그런데 조종실은 초비상. 정해진 항로를 비행하는 중 다른 비행기를 볼 확률은 극히 희박하기에 이는 분명 무언가 잘못된 것이었다.
이에 조종실에서는 급히 교신 시도를 했지만 묵묵부답. 충돌을 대비해 고도를 낮추는 그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기체가 중심을 잃었다.
기내는 아수라장이 되고 조종실의 김창규 기장은 왼쪽 날개가 잘려나가고 엔젠도 하나 꺼진 것을 확인했다. 이에 더 이상의 비행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그는 비상 착륙을 준비했다. 대표
하지만 몇 번의 착륙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연료까지 바닥을 보였다. 이에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착륙이 시도했다.
승객 109명의 목숨이 걸린 비상 착륙. 902편이 착륙한 이곳은, 바로 눈이 잔뜩 쌓인 미지의 공간이었다. 구조를 기다리던 승무원과 승객들. 그런데 이들 앞에 등장한 것은 총을 든 군인들이었다.
비행기가 비상 착륙한 곳은 바로 소련의 어느 곳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이 이끄는 민주주의와 공산진영의 냉전 체제가 자리 잡고 있었고, 소련은 우리에게 북한과 다를 것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사실. KAL 기는 기체 결함이 문제가 아니라 소련에 의해 격추 당해 떨어지게 된 것이었다. 소련 영공에 들어온 우리는 그들에게 침입자였던 것이다. 민항기였음에도 격추당한 KAL기.
승무원과 승객들은 소련군에 의해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리고 한국에 이 사실이 알려졌다.
켕의 한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 공포감에 이들은 끼니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소련군의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소련군은 우리 비행기가 미군 정찰기가 아닌지 의심했던 것이다. 민항기라는 사실을 어필했음에도 쉽게 믿어주지 않는 소련군. 특히 소련군은 기장과 항법사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고의로 소련의 영공을 침범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소련군은 기장과 항법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한국으로 송환했다. 그리고 가족들 곁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비상 착륙으로 목숨을 잃은 두 사람의 유해도 함께 했다.
미국의 송환 요청에도 소련군은 묵묵부답. 이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두 사람에 대한 조속한 송환을 요청했고 열흘이 지나 기장과 항법사도 가족들 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5년 후 1983년 뉴욕 JFK공항에서 이륙한 대한항공 항공기는 또다시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에 잘못 들어섰다. 당시 자동항법장치가 설치되었으나 수동 모드가 되며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해당 항공기를 또다시 격추했고, 이에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던 승무원과 탑승객 269명이 전원 사망했다. 한국 국적기가 당한 최악의 사고이자 5년 만에 반복된 비극이었다.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한 국민들, 하지만 정당방위라 주장하는 소련. 소련 붕괴 전까지 격추한 민항기 9대, 그중 2대가 우리나라의 민항기였다.
이후 다행히도 민간항공기를 격추하지 못하도록 법안이 개정되었다. 모든 항공 규정은 피로 쓰였다는 말처럼 많은 시행착오와 희생의 결과로 이러한 법안이 만들어져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GPS의 민간 사용이 허락되고 항로 시스템도 점점 개선되었다. 이는 다행이지만 씁쓸함이 남아 아쉬움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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