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납치사건의 숨겨진 공모자들 [안병욱 칼럼]
안병욱|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1973년 8월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일본 도쿄 한 호텔에서 김대중을 대낮에 납치했다가 닷새 뒤 서울 자택 골목에 팽개치듯 풀어줬다.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유신 이후 미국과 일본에 머물면서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추진하던 중이었다. 지난해 12월25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사건 발생 50년에 맞춰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확보한 일본 경찰 쪽 자료를 보도했다. 50주년 정보공개라는 설명에 혹시 그동안 알려지지 않던 내용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보도된 내용은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에 지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은 과거사위원회(2004~2007)를 만들어, 지난날 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서 자행했던 수많은 인권침해와 권력남용 행적들을 외부인사 힘을 빌려 조사해 공개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최우선 규명 과제였다.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정원이 납치사건 진상규명에 나서자,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항의하면서 조사 중단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이미 한·일 양국이 합의해 종결했는데 새삼 다시 들추어내 분쟁을 초래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의 이런 태도는 독일과 프랑스 정부와 비교된다. 1967년 중앙정보부는 서독과 프랑스에서 우리 교민과 유학생 수십명을 국내로 납치 연행해 와 간첩·이적행위로 최고 사형선고까지 내렸다. 이 동백림 사건으로 영토주권을 침해당한 프랑스와 서독은 박정희 정권의 탈법적 공작과 폭압적 권위주의 통치를 규탄하면서 납치 연행된 자들의 원상회복을 요구했고 끝내 박정희의 굴복을 받아냈다. 독일과 프랑스 정부는 30여년 뒤 어렵사리 진행된 한국의 과거사 청산 활동도 양해해줘 현지조사가 가능했지만, 일본은 그 반대였다. 돌이켜 보면 한국 독재정권이 수백명 재일동포 청년들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사회 통제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을 때도, 강력하게 항의하고 헌신적으로 구명에 나섰던 일본 시민사회와 달리 일본 정부는 수수방관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조사를 진행하던 2006년은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에 출마해 선거운동을 하던 때였다. 이 일로 일본을 찾은 한국 대표에게조차 일본 정부는 김대중 납치사건 조사 발표 중단을 선결문제로 제기했다. 유엔총회 일본 대표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표될 경우, 일본 정부도 상응하는 조처를 할 수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일본의 이런 집요한 항의에 국정원 과거사위는 조사 내용 발표회를 진행하지 못하고 조사보고서 발간으로 마무리했다. 중간발표회와 최종결과보고회를 통해 과거사와 진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고 과거청산의 역사의식을 공유할 수 있었던 다른 사건들 처리와 비교된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발표회 일정을 잡으면 우리 외교부가 곧바로 연기를 간청했다. 이를 서너차례 거듭하다 끝내 공개회견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런데 그 집요하던 일본 정부가 막상 보고서가 발표된 뒤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를 보면서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놓친, 무언가 숨겨진 일이 따로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사실 이 사건에는 여러 일본인이 깊게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처음 시도된 공작은 일본 야쿠자를 동원해 김대중 신병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야쿠자에게 공작금이 지급됐고 살해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이런 공작을 일본 경찰도 파악했으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또 사건을 조사하면서 힘들게 확인한 사실은, 아사히신문 정치부 고위 관계자가 김대중의 일본 내 행적을 수집해 중앙정보부에 제공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국 공작원의 요구에 따라 취재를 빙자해 김대중을 만나 세세한 일정까지 알아내 알려줬다. 김대중과 조찬을 하면서 파악한 내용이 그날 오전 중앙정보부에 전신으로 보고되었고, 저녁때 수집한 첩보는 이튿날 곧장 서울로 보고됐다. 그뿐 아니라 일본 총리실 비서관도 협조자로 등장했다. 그는 김대중을 악덕 정치인이라고 매도하면서 총리면담 요청은 물론 일본 정치인 접촉을 중간에서 차단했고, 그런 동향을 한국 정부에 제보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 공작원들에게 협조한 자국 첩자들을 당연히 파악했을 것이고, 그런 기록들이 아사히신문의 사건 50주년 보도로 드러나기를 기대했었다.
당시 용금호라는 중앙정보부 공작선이 오사카항에 10여일 동안 특별한 업무도 없이 정박했다가 납치된 김대중을 태우고 야밤에 출항했는데, 이 과정을 일본 쪽이 그대로 방관했던 것도 의아했다. 어설픈 중앙정보부 공작원들이 대낮에 공공연하게 활동했는데 이를 묵인해온 일본 정부 태도부터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한·일 양국은 1973년 11월2일 김종필 총리가 다나카 총리에게 박정희 사과 친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 자리에서 다나카는 “아무튼 김대중은 일본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 그만한 정치적 센스도 없는 사람이라면 장래성도 없는 사람으로 본다”고 했고, 덧붙여 “엉뚱한 자들이 나와서 대통령(박정희)이 시켜서 한 것이라고 하면 야단이다. 그러한 일이 없겠지요?”라고 다짐을 받기도 했다.(외교부 2006년 공개문서) 면담 전 사전 조율작업으로 이병희 무임소장관은 다나카에게 3억엔을 전달했다. 한·일 간 결착을 위해서 공작금 혹은 사후처리비 정산이 필요했던 것인가? 3억엔 전달 사실은 당시 그 돈을 마련해준 것으로 알려진 조중훈 대한항공 사장의 행적, 사건 당시 도널드 레이너드 미 국무부 한국과장의 증언, 돈을 건네는 현장에 있었던 다나카 지역구 정책담당비서 기무라 히로야스 진술 등을 취재한 언론 보도를 통해 밝혀졌다.
납치공작 총책인 일본주재 한국공사는 사건 현장에서 천연덕스럽게 사태 수습에 나서고, 아사히신문 고위 간부는 공모자였음을 숨긴 채 사건 기사를 다루고, 한국 언론의 특파원 또한 납치공작에 가담했으면서도 현지 특파원 자격으로 기사를 송고하는 블랙코미디가 전개됐다.
이런 추악한 뒷모습을 두고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일본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며 “사건의 실체가 밝혀졌는데도 정치 결착으로 진실을 은폐하려는 한국과 일본의 저급한 정치인들의 작태에는 아직도 분노한다”는 소회를 토로했다. 그 같은 두 나라 저급한 정치인들의 유착은 목하 윤석열 정권에서도 한심스럽게 재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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