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300만원 샤토 무통 로칠드를 23만원에…고급 와인의 민주화 ‘클럽 코라빈’

유진우 기자 2024. 1. 1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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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와인은 레스토랑을 대표하는 얼굴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으레 하우스 와인은 와인 메뉴 가장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한 잔씩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가격이 제일 저렴하다. 대체로 여느 음식과도 무난히 마실 만한 개성 없는 와인이 대부분이다. 소비자도 온전한 와인 한 병을 다 시키기 어려울 때에나 딱히 끌리지 않아도 하우스 와인을 시킨다.

좋은 평가를 받는 레스토랑은 이런 하우스 와인 하나 허투루 고르는 법이 없다. 레스토랑 콘셉트에 맞춰 셰프가 추구하는 지역 와인을 고르거나, 단가를 높이더라도 음식 맛을 끌어 올려줄 만한 와인을 선호한다.

마틴 베라사테기, 고든 램지 같은 세계적인 셰프들은 직접 와이너리에 본인 요리에 맞는 하우스 와인을 매년 수백 수천병씩 따로 주문한다. 특별 주문한 이들 와인은 겉면에 레스토랑 상호를 붙이고, 해당 레스토랑에서만 맛볼 수 있는 한정판으로 불티나게 팔린다.

모든 레스토랑이 하우스 와인에 이렇게 공을 들이기는 어렵다. 와인은 따는 순간 산소와 닿자 마자 맛이 바뀐다. 비싸고 품질 좋은 와인을 하우스 와인으로 삼으려면 한 병을 따자 마자 바로 팔아야 한다. 따 놓고 안 팔린 와인은 가격과 상관없이 폐기된다.

그렇다고 하우스 와인에 아쉬움을 드러내는 손님들 요구에 눈 감기도, 주류(酒類) 매출을 포기하기도 쉽지 않다.

2011년 첫 선을 보인 ‘코라빈(Coravin)’은 와인업계에서 이 고민을 해결하는 가장 현대적인 방법으로 알려졌다. 하우스 와인으로 좋은 와인을 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인 ‘보존 기한’을 혁신적으로 늘려준다.

MIT를 졸업한 미국 생물의학자 그렉 램브리트는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하자 함께 와인 마실 사람이 없어졌다. 와인을 마실 상대가 사라지니 매번 한 병을 다 마시거나 남겨야 했다. 남은 와인은 맛이 변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는 남은 와인을 ‘완벽한 한 잔’으로 살리기 위해 본인 전문 분야였던 생물의학을 접목했다.

램브리트는 1990년대 후반에 소아 항암요법에 외과의사들이 사용하던 초미세 주사 바늘을 떠올렸다. 이 바늘을 이용해 코르크를 따지 않고 와인을 따라 마실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는 초미세바늘을 코르크 깊숙이 찔러 넣어 질소 가스를 주입하고, 와인을 끌어올리는 방식을 개발했다. 질소 가스는 산소보다 반응성이 낮고 무거워 와인과 산소 접촉을 막는다. 짧게는 4주, 길게는 3년까지 와인을 처음 마셨던 상태 그대로 즐길 수 있다.

이 기구는 발매 이후 전 세계 와인 애호가와 소믈리에를 중심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와인 한 병을 시간 제약 없이 마실 수 있는 와인 보존 시스템이 등장하자 프랑스 다니엘 블뤼, 미국 조지 밀리오테스 같은 외식업계 유명인들은 앞장 서서 레스토랑에 코라빈을 들였다.

당신은 그렉 램브리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겠지만,
지난 10년 동안 괜찮다 싶은 레스토랑에서 하우스 와인을 마셨다면
램브리트 덕분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포브스, 2023

코라빈은 2011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총 100만대가 넘게 팔렸다. 영국 유력 매체 더 스탠더드는 ‘유구한 와인 관련 기구 역사에서 단일 제품이 이렇게 많이 팔린 경우는 드물다’고 평가했다.

우리나라에도 일부 와인 애호가와 소규모 와인 바에서 코라빈은 알음알음 쓰였다. 그러나 수십만원대를 호가하는 가격과 하우스 와인을 보편적으로 즐기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한 탓에 좀처럼 입지를 굳히지 못했다.

그래픽=손민균

지난해 12월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잠실점 6층에 문을 연 클럽 코라빈(Club Coravin)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코라빈 전용 와인 라운지다. 국내에서 코라빈만 사용해 와인을 서빙하는 라운지는 이 곳이 유일하다.

클럽 코라빈은 한 잔씩 주문해 마실 수 있는 와인이 500여종에 달한다. 보통 스파클링·레드·화이트 종류 별로 적으면 한 종류, 많아야 5종류 안팎인 다른 레스토랑에 비해 압도적인 다양성을 자랑한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국내 미쉐린 가이드 등재 레스토랑에서 글라스 단위로 즐길 수 있는 와인은 보통 10~20여 종이고, 해외 유명 와인바도 3백여 종에 그친다”며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국내 와인 시장이 대중화를 넘어 성숙기에 접어들었다고 보고, 아시아권 최대 규모로 와인 중심 주류복합문화공간을 열었다”고 말했다.

코라빈을 사용하면 와인 코르크에 손상이 가지 않은 상태로 최대 3년까지 서빙할 수 있다. 오래 팔 수 있으니 재고나 폐기에 대한 염려가 없어 고가 와인도 한 잔 단위로 판매한다.

직접 둘러보니 500여종 와인이 빼곡히 실린 리스트는 태블릿으로 제공했다. 클럽 코라빈은 국내 유수 와인 수입사 아영FBC가 운영한다.

리스트에는 익히 알려진 프랑스 보르도 지역 최고급 와이너리 혹은 부르고뉴 지역 그랑크뤼, 미국 나파밸리 초고가 와인이 즐비했다. 한 병을 온전히 레스토랑에서 마시려면 100만원을 훌쩍 넘는 와인들이다.

가령 시중 실구매가 150만원, 고급 외식업장 주문가 300만원을 호가하는 샤토 무통 로칠드 2011년산 75밀리리터(ml) 1잔은 23만원이었다. 75ml는 보편적인 글라스 와인 1잔 수준이다. 와인 1병으로 10잔 정도 서빙할 수 있다.

그래픽=손민균

대다수 소비자라면 수백만원대 와인 한 병을 온전히 사마시기는 부담스럽다. 다만 그 와인 가격 10분의 1 정도를 투자해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은 소비자에게 클럽 코라빈은 다른 레스토랑은 제공하지 못하는 선택지를 제공한다. 누구나 한 잔 정도는 시도해 볼 만한 ‘고급 와인 민주화 시대’를 연 셈이다.

그렇다고 리스트에 비싼 와인만 나열하진 않았다. 가장 저렴한 와인은 한 잔에 7000원선에서 시작했다. 절반 이상은 75ml 한 잔에 3만원을 밑돌았다. 한 병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백화점 와인 매장 판매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손성모 클럽 코라빈 총괄 소믈리에는 “선택지가 다양해지니 소믈리에 입장에서 손님에게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하기 매우 자유로워졌다”며 “손님들도 500여종 와인 가운데 본인 취향에 맞는 와인을 전문가와 함께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좋은 와인이라면 그에 걸맞는 음식이 빠질 수 없다. 주방은 스페인 요리로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에서 별을 받은 떼레노 서울 신승환 셰프가 담당한다.

신승환 셰프는 세계적인 미식 중심지로 꼽히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서 수학한 경험을 살려 클럽 코라빈 메뉴를 준비했다.

신승환 떼레노 서울 셰프는 “클럽 코라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떼레노 서울에서 만드는 다양한 음식과 좋은 와인 궁합을 어떻게 맞출 수 있는지 심사숙고해서 메뉴를 정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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