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클림트 그림 속 ‘생물학적 코드’를 찾아서
정자·난자, 수정, 세포분열 등
과학 지식 활용한 클림트 그림들
과학과 예술 어우러진 현장으로
클림트를 해부하다
‘키스’에서 시작하는 인간 발생의 비밀
유임주 지음 l 한겨레출판 l 2만원
뇌에 기억이 저장되는 메커니즘을 밝혀내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던 신경과학자 에릭 캔델(95)은 ‘통찰의 시대’(2012)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던 오스트리아의 빈, 흔히 ‘세기말 빈’이라 불리는 시공간 속에서 표현주의 예술가들과 과학 사이에 깊은 상호작용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예컨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그림 속에 다양한 형태의 장식들을 집어넣었는데, 그것들은 정자와 난자 등 과학 발전으로 새롭게 발견해낸 생물학적 형상들과 닮았다는 것이다.
2006년 강연에서 캔델의 주장을 접했던 해부학자 유임주(고려대 의과대학 교수)는 2021년 동료 김대현·박현미 교수와 함께 ‘미국의사협회저널’(JAMA)에 ‘클림트의 ‘키스’와 인간 초기 발생학’이란 논문을 게재해 이목을 끌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1907~1908)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을 이루고 이것이 세포분열을 해 ‘오디배’에 이르는 인간 발생 첫 3일 동안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유임주의 첫 책 ‘클림트를 해부하다’는 바로 이 논문을 토대로 삼아 과학과 예술이 깊은 상호작용을 벌인 ‘빈 모더니즘’의 시대와 그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새로 얻은 생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생로병사를 그려내려 했던 클림트의 작품 세계 등을 두루 살핀다.
‘세기말 빈’에선 기성세대에 실망한 지식인들이 살롱·카페에 모여 온갖 지적인 활동을 공유하며 새로운 시도를 벌인 ‘빈 모더니즘’이 꽃폈다. ‘분리파’ 운동을 주도한 클림트는 이 흐름을 대표하는 예술가였다. 당시 지식인들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1859)과 이를 번역해 독일어권에 소개한 에른스트 헤켈(1834~1919)의 작업을 통해 진화론 등 새로운 생물학 지식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클림트 역시 함께 어울렸던 빈 의대 교수였던 에밀 주커칸들로부터 생물학·해부학 지식을 습득했다. 헤켈이 ‘자연의 예술적 형상’ 등에 그려놓은 그림들의 영향은 클림트의 여러 그림들 속에서 나타난다.
두 남녀가 입 맞추려는 순간을 담은 ‘키스’는 클림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여기에 담긴 생물학적 도상을 찾아보기 전에, 먼저 인간의 탄생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이 어떻게 쌓여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포를 직접 관찰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인간 발생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1674년 안토니 반 레벤후크가 자작 현미경으로 사람의 정액을 관찰해 정자가 생식 과정의 공통적 요소라고 짚었고, 150년 후인 1827년 카를 에른스트 폰 베어는 포유류의 난모세포를 발견했다. 1875년 오스카 헤르트비히는 정자와 난자가 융합(수정)하여 새 생명이 시작되고, 그 과정엔 오직 하나의 정자와 하나의 난자만 관여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인간 발생의 대략적 과정을 보면, 정자와 난자가 완전히 수정을 이룬 세포인 ‘접합자’가 2·4·8개로 분열하고 수정 뒤 3일차엔 여러 분할알갱이로 이뤄진 ‘오디배’가 된다. 자궁으로 운반된 오디배는 그 속에 액체 공간이 생긴 ‘주머니배’가 되는데, 주머니배가 자궁 내막에 착상하여 태반을 형성하고 본격적으로 배아로 발달할 준비를 한다.
‘키스’ 속 남자의 옷에는 남성성을 상징하는 직사각형의 도상들이, 여자의 옷에는 정자를 상징하는 듯 꼬리가 붙은 다각형 도상들이 있다. 여자의 옷에 배치된 파란색 경계선의 원들은 난자의 형태와 닮았다. 원 안쪽은 중심부의 어두운 노란색과 그 정중앙에 찍힌 파란 점, 그리고 바깥의 밝은 노란색 등으로 나뉘는데, 이는 각각 난자 핵(Nucleus)과 핵 내부의 소기관인 인(Nucleolus), 수정 뒤 배아의 영양분으로 사용될 세포질 등의 표현이다. 유독 단 하나의 난자만 푸른 경계선이 아닌 주황색 경계선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수정된 난자의 표현으로 ‘오직 하나의 정자와 하나의 난자만이 수정에 관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여자의 옷에는 8개의 원이 뭉쳐 있는 도상과 12개 정도의 원이 뭉쳐 있는 도상이 있다. 지은이는 이것이 접합자가 세포분열하여 오디배에 이르는 단계를 표현한 것이라 본다. 정리하자면, “남자의 정자, 여자의 난자가 수정되어 접합자로 발달되고 오디배에 이르는, 인간 발생 첫 3일간 일어나는 이벤트”를 그렸다는 것이다.
‘키스’로 시작한 분석은 그리스 신화 속 임신의 순간을 담은 ‘다나에’(1907~1908), 임산부를 그린 ‘희망 Ⅰ’(1903)과 ‘희망 Ⅱ’(1907~1908), 여인의 탄생과 노화를 그린 ‘여인의 세 시기’(1905), 죽음을 주제로 한 ‘죽음과 삶’(1910~1915), ‘생명의 나무’로 유명한 ‘스토클레 프리즈’(1905~1919) 등으로 이어진다. 클림트 그림 속 보라색 시폰 천은 태아막의 상징으로 주로 나타나는데, ‘다나에’에서는 이 위에 수놓아진 둥근 도상들을 통해 “오디배가 주머니배로 발달해 자궁에 착상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키스’의 직후, 곧 인간 발생 4~7일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린 셈이다. ‘여인의 세 시기’는 왼편의 노인과 오른편의 엄마·아기를 대비시켜 지금 건강하고 아름다운 존재도 쇠약한 노인이 되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 모양 장식들로 배경을 채웠는데, 마치 실제 인간의 세포가 그러하듯 엄마·아기 쪽은 크기가 크고 뚜렷하게, 노인 쪽은 위축된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렇게 생물학적 도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데 대해, 지은이는 아버지와 동생 등을 잃고 난 뒤 클림트가 당대에 밝혀진 의학적 사실을 반영한 ‘클림트 코드’들을 통해 인간의 생로병사를 그리려 했다고 풀이한다. 클림트가 가장 애정을 가졌던 ‘죽음과 삶’은 죽음과 삶이 순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림 속 세포분열의 장면을 포착한 도상들에는 “인간 개개인의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인류의 생명력은 세포분열과 생식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져 영속한다는 클림트의 생각이 담겨 있다.”
이밖에 지은이는 오딜롱 르동, 가브리엘 폰 막스, 에곤 실레, 에드바르 뭉크,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바실리 칸딘스키 등 여러 화가들이 당대의 과학적 발견들을 어떻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작품 속에 녹여냈는지도 보여준다. 과학과 예술이 긴밀하게 어우러지는 구체적인 현장들을 만나게 해준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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