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유신 시대, 서러운 글쓰기…“자유는 신음 아래 영근다”

한겨레 2024. 1. 1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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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책 | ‘한국문단사’ 반세기 전설 김병익
당대 정권·변절 지식인도 비판
지난해말 ‘기억의 양식들’까지
문학·정치 횡단 ‘청년 비평가’
새해 독자들에 “자유에의 믿음”
원로 문학평론가 김병익(86)의 첫 저서 ‘한국 문단사’는 지난해 말로 초판 발행 50주년을 맞았다. 근현대 문학인들의 명과 암을 ‘기사체’로 진단한 기념비작. 일제시대 변절한 작가들을 짚으며 유신 시대 지식인들을 우회 비판하기도 했다. 2016년 한겨레와 인터뷰 당시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
1973년 말 첫 출간된 ‘한국 문단사\'. 그해 상반기 발행된 신문 연재 기사를 보완해 엮었다. 김병익은 그해 10월 쓴 서문에 “우리 선배의 훌륭한 모습과 비굴한 잘못들의 모두가 일종의 운명애처럼 필자를 사로잡았다”고 썼다.

한겨레 문학 담당 기자의 청으로 여는 이 글은 여든 너머의 그 손떨림처럼 반세기 전의 수선스러운 시절을 향한 회상으로 어깃장 놓는 내 마음을 다독거리며 젊은 시절의 안타까움을 되찾아가게 한다. 우리 경제 발전과 정치적 민주화의 출발이란 훗날의 평가와는 달리 억압의 만연과 독재의 횡포 속에 ‘남산’이란 공포와 ‘고문’이란 독성을 염두에서 떨칠 수 없는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내 첫 책이 될 ‘한국 문단사’가 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술과 사상의 자유로움, 글쓰기와 글쟁이들의 어울림, 그것들을 즐기고 누리는 정서적 활달함에 나는 척을 지는 듯해 있었다.

‘문단(文壇)’이란, 작가들과 그들이 어울려 한바탕 판을 벌이는 도떼기시장 같은 무질서와 난잡이 자유로움과 발랄함이란 판세를 품은 놀이터를 연상시킨다. 유신이 선포되고 훗날의 경제사적 평가와는 달리 당시의 정치와 그 현실을 전해야 할 언론이 피할 수 없이 젖어야 할 공포스런 실제는 느닷없는 억압과 그 현장 보고의 두려움이었다. ‘물가 인상’을 ‘가격 현실화’라고 호도하고 남산의 고문이란 공포를 암시라도 해야 할 ‘기자’의 내면을 어떻게 고백해야 할까. 나의 ‘한국 문단사’는 이런 ‘유신’의 억압감 속에서 씌어졌다. 한국 근대문학의 단초부터 시작하는 이 저작은 자유와 탄압, 그 공포와 보신의 승강이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되돌아보는 50년 전의 유신 시절 일들과 그것을 치러내야 했던 과정을 삭임질하는 노경의 내 의식 사이에는 여러 두런거림이 있다. 그 공포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거리낌 없이 누리는 자유 사회가 가능했다고 자부해야 할까, 그 횡포 속에 이제의 당당한 민주화가 성취되었다고 옹호해야 할까, 그 제약 아래 현대의 자유민주 체제가 성취되었다고 자위해야 할까. 우리가 열망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꼭 그런 탄압과 통제에서 이루어져야 되는 것일까. 그 답답함에 프랑스 혁명이 이념으로 내세운 그 자유와 이 민주주의 체제가, 숱한 신고를 겪은 끝에 한 세기 넘어서야 현실화되었다는 역사를 음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자유는 신음 속에서 영글어지는 것이고 민주주의는 그 타작 아래 거두어지는 것이리라.

김병익은 1975년 문학과지성사를 창사해 대표로 재직해오다 2000년 퇴임했다. 사진(1972년)은 계간 ‘문학과지성’ 편집 동인인 김현·김치수·김병익·김주연(왼쪽부터)씨로 ‘문지 4K’로 불리었다.

내가 ‘신문’으로서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듣고 보고 알리는 일보다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고 다행한 일들을 적어 내려가는, 문단의 ‘역사’라는 과거의 일지를 쓰게 된 것은 그래도 다행이었다. 나는 일제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1970년대의 강요된 근대화 시대를 염두에 두었고 가난에 절었던 식민 사회의 지식인을 묘사하면서 유신 치하의 작가들이 겪던 남산의 공포를 연상했다. 내 어설픈 ‘문단 반세기’는 이렇게 50년 전의 정황 속에서 씌어졌고 좀 더 그럴듯한 제목으로 바꾼 ‘한국 문단사’는 이렇게 상재되었다. 한국 문학 50년의 야사적 기록이 ‘유신’의 풍성한 이미지로 옮겨가던 일은 그런 내면의 움직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대학에서 전공하지 못한 우리 문학의 그 역사를 공부할 수 있었고 1960~70년대의 지식과 의식의 한계를 그 식민 시대의 문학적 상상력이 보인 자유를 향한 열망과 창조에의 집념으로 신문 독자들에게 전해드릴 수 있었다. 그것은 젊어 소심한 기자로서의 내게 반가운 탈출구였고 앞날이 창창한 문학소년 시절을 겪은 정치학도의 자유를 향한 열망의 표출구였다.

이제 내 스스로에게도 잊혀져가는, 그래서 다시 펼쳐보는 면면에서 나는 식민 시대와 유신 시대를 겹쳐 찾아내는 내 노년의, “그래도 참 애썼다”고 내 젊은 날을 자위하는 회상의 자락이 되고 있다. 나이가 안기는 안쓰러움을 위로하는 그 회고의 기회에 그 감상의 내역을 만들던 옛적의 내 자신이 우선 고맙다. 세상은 밝고 세월은 자유로움을 향하고 있음을 다시 깨닫는다.

■ 그리고 다음 책들

지성과 반지성

박정희 정권이 한창이던 시절 그 독재와 자유억압에 고민하며 쓴 글들의 모임이다. 그 까다로운 시절, 어찌 그런 글이 발표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이지만 억압과 고통을 식민시대로 빗대어 씀으로써 검열의 어려움을 넘기고 출판될 수 있었지만 발간 3년 후인가 드디어 들통이 나 판금 되었다. 유신 시절에 피할 수 없었던, 그러나 드러내야만 했던 지식 사회의 현실의 모습과 그 괴로움을 고백하고 있다.
민음사(1974)

상황과 상상력

‘현대한국문학의 이론’(공저), ‘한국문학의 의식’에 이은 것으로 이후의 이른바 열서너 권의 문학평론집들의 앞잡이이다. 분단 시대의 문학인으로서 한국의 현실과 당대의 역사를 고민하며 문학이 그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 왔는가를 탐색하고 있다. 세계와 한국, 역사와 현실, 현상과 언어를 비롯한 나름의 인식과 사유를 고백하며 반추하며. 우리 문학의 실제에 대한 젊은 고민이 스며 있다.
문학과지성사(1979)

페루에는 페루 사람들이 산다

고대문명의 마추픽추와 페루 여행에서 받은 감동, 자연 그대로의 아프리카와 그 설움을 느끼며 드러낸 글 등 내 잦지 않은 여행의 소감을 모았다. 내게는 낯선 그 모습들은 그럼에도 내 속의 또 다른 세계로 내 마음을 움직거렸고 좋은 내 집의 울타리 너머의 세상을 보고 느끼게 한다. 그래, 세상은 넓으면서 제각기 품을 품는다. 여행이란 세계의 확장이고 내면의식의 외출임을 확인한다.
문학과지성사(1997)

글 뒤에 숨은 글

자서전 대신, 그러나 내 글쓰기의 직분에 대한 의식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생각 뒤에 숨은 생각’ ‘말 뒤에 숨은 말’ ‘책 뒤에 숨은 책’으로, 문필로 보낸 초라한 한 생애의 이력이 여기서 드러나는데, 덧붙이자면, 그래서 가난할 수밖에 없는 내 생애에 대해 나는 부끄러움도 아쉬움도 없음을 밝히고 싶어하고 있다. 그것은 자부도, 아쉬움도 없는 담담한 소회의 잇달음이어서 나는 달리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피해 이 짧고 소박한 글로 대신하곤 한다.
문학동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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