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가치다신주의 시대에 학자·정치인에게 필요한 윤리
과학·정치의 직업윤리 살펴
“학자는 예언자 아닌 교사
정치인의 핵심 덕목은 책임윤리”
직업으로서의 과학·직업으로서의 정치
막스 베버 선집 4
막스 베버 지음, 김덕영 옮김 l 길 l 3만원
막스 베버(1864~1920)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비롯해 수많은 저술로 현대 학문에 심원한 영향을 준 독일 사회학자다. 베버의 저작 가운데 일반인에게 가장 널리 읽힌 것이 ‘직업으로서의 과학/직업으로서의 정치’인데, 국내에도 여러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두 편의 강연문을 묶은 이 저작이 베버 전문가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의 새 번역 작업을 거쳐 ‘막스 베버 선집’ 네 번째 권으로 나왔다. 이 번역본에는 본문 분량에 육박하는 상세한 옮긴이 주석과 베버 학문 세계 전체를 조망하는 가운데 강연 내용을 해설하는 긴 해제가 달려 있다. 옮긴이는 그동안 ‘학문’으로 번역돼 오던 말(Wissenschaft)을 ‘과학’으로 바꾸었다.
두 강연 가운데 앞엣것(‘직업으로서의 과학’)은 1917년 11월 뮌헨에서 열렸고, 뒤엣것(‘직업으로서의 정치’)은 1년여 뒤인 1919년 1월 같은 곳에서 열렸다. 베버 강연을 기획한 단체는 ‘자유학생연맹’ 바이에른 지부였다. 당시 독일은 19세기 후반 이래 급속한 산업화를 겪었는데 그 여파로 독일 대학은 전문 기술을 가르치는 직업훈련소와 유사한 곳이 됐다. 자유학생연맹은 이런 변화에 맞서 대학의 참된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 단체에 속해 있던 대학생 알렉산더 슈바프는 1917년 5월 발표한 글에서 정신노동이 돈벌이용 직업이 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이 글이 반향을 일으키자 연맹 지부가 ‘직업으로서의 정신노동’이라는 연속 강연을 기획했고, 베버의 두 강연은 그 연속 강연의 일부로 열렸다.
두 강연에서 베버는 자신의 시대 인식을 바탕에 깔고 ‘과학이라는 직업’과 ‘정치라는 직업’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한다. 베버의 시대 인식은 ‘탈주술화’(탈마법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주술적 이해가 오랜 합리화 과정을 거쳐 축출당한 시대가 우리 시대라는 인식이다. 이때 탈주술화는 공동체를 통일해주던 종교적 믿음이 깨져나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특정한 신념이나 신앙이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고 각자가 저마다 세운 가치를 신봉하는 ‘가치다신주의’ 시대가 열렸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과학(학문)을 직업으로 삼은 학자들과 정치를 직업으로 삼은 정치인들이 어떤 윤리적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를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두 강연문이다.
첫 번째 강연문에서 베버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학문에 관한 통념을 반박한다. 학문은 학생들을 ‘진정한 존재’, ‘진정한 예술’, ‘진정한 자연’, ‘진정한 신’,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로 이끌어 ‘이 세계의 의미’를 밝혀준다는 통념을 해체하는 것이다. 베버는 합리화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는 어떤 학문도 이런 기능을 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학문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주지 않는다. 학문의 본분은 객관적 사실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이지 ‘진정한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다.
베버의 학문 규정은 학자-교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당대 독일의 대학 교수들은 자신의 주관을 앞세워 학생들에게 인격의 도야를 역설하고 가치관과 세계관, 신조와 이념을 설파했다. 베버는 이런 교수들을 두고 ‘강단예언자’라고 부른다. 신의 말씀을 받아 공동체에 전하는 예언자가 과거의 유물이 된 마당에, 교수들이 그런 역할을 자임해 ’교사‘가 아니라 ’지도자‘가 되려 한다는 비판이다. 이런 행태는 학문의 본질을 망각한 처사다. 베버는 학자에게 지도자가 되려는 욕구를 억제하는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학자가 자기 절제를 견지하려면 “확고한 내적 소명 의식”을 품고 “직업적인 ‘일상의 요구’”에 헌신해야 한다.
베버는 이런 자기 절제 속에서 연구와 교육의 역량을 키우는 것을 ‘지적 성실성’이라고 부르고, 이 지적 성실성이 ‘학자의 인격’을 이룬다고 말한다. 요컨대 지적 성실성을 핵심으로 하는 자기 절제야말로 이 시대가 학자에게 요구하는 ‘윤리적 자세’다. 이런 말을 할 때 베버의 마음에는 어떤 ‘체념’의 정서가 배어 있다. 예언자 없는 시대에 학자는 학문의 방법과 생각의 기술을 훈련시키는 데 만족해야 한다는 체념이다. 베버는 이 체념이 오늘날 학문의 불가피한 요구이며 ‘교사의 직분’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야말로 학자의 윤리라고 강조한다.
정치라는 직업을 다루는 두 번째 강연도 가치다신주의라는 시대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여기서 베버는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로 ‘열정과 책임감과 현실감각’을 꼽는다. 베버가 말하는 열정은 무분별한 낭만주의적 흥분이 아니라 특정한 대의 곧 정치적 이념·이상·목표를 향한 헌신이다. 책임감이란 허영심에 들뜨거나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고 “대의에 대한 책임 의식을 행위의 길잡이로 삼는 것”을 뜻한다. 현실감각이란 “내적 집중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수용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 곧 사물과 인간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이다. 정치인에게 ‘거리 두기 능력’의 없다면 정치에 ‘대죄’를 짓는 것이라고 베버는 일갈한다. 결국 뜨거운 열정을 냉정한 현실감각과 어떻게 통합하느냐가 정치인으로서 성패의 관건이 된다.
베버가 더 강조하는 것은 ‘정치와 윤리의 관계’다. 이 관계를 베버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대비해 설명한다. 신념윤리란 행위의 동기와 의도를 중시하는 윤리이며, 책임윤리는 행위의 결과와 그 결과에 따르는 책임을 중시하는 윤리다. 이 둘 사이에는 “심연과도 같은 차이”가 있다. “만약 순수한 신념에서 나오는 행위의 결과가 나쁘다면, 신념윤리가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행위자가 아니라 세상, 즉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으로 돌린다. 반대로 책임윤리가는 인간의 평균적인 결함들을 고려하며 또 자기 행위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던 한에서는 그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이라면 책임윤리를 기본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어떤 신념도 보편성을 지닐 수 없는 가치다신주의 시대이기에 신념만으로는 정치의 윤리가 바로 설 수 없다. 동시에 신념윤리가 없다면 책임윤리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책임윤리를 기본으로 삼아 신념을 관철하는 것, 이것이 현실정치에 필요한 윤리적 자세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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