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詩 읽기] 나는 누구에게 어떤 수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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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째다.
화자는 머금고 있던 습기를 다 내어주는 수건과 자신의 삶을 나란히 놓는다.
이때 수건은 비교 대상이라기보다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가 매번 자각하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도 누구에겐가, 그 무엇에겐가 '수건'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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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째다. 자발적 유배랄까. 나는 요즘 전남 해남 ‘백련재 문학의 집’에 머물고 있다. 백련재는 해남군이 땅끝순례문학관과 함께 운영하는 작가 레지던스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품고 있는 연동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련재는 니은(ㄴ) 자 한옥으로 집필실이 일곱개다. 아침이면 샛노란 햇살이 방 안 깊숙이 파고든다.
여기서는 자취를 한다. 손수 끼니를 해결하고 빨래도 해야 한다. ‘혼자살이’가 밀린 원고를 정리하는 일 못지않게 낯설다. 하루하루 독거(獨居)에 관한 이야기 목록이 늘어난다.
시 ‘수건’의 화자는, 정채봉 작가(1946∼2001년)의 말년으로 미뤄보건대, 지병을 다스리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시를 떠나 혼자 살기만 해도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데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병자라면 얼마나 달리 보였을까.
화자는 머금고 있던 습기를 다 내어주는 수건과 자신의 삶을 나란히 놓는다. 이때 수건은 비교 대상이라기보다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뿐이랴, 눈송이 또한 거울이다.
시를 이렇게 읽어보자. 우리가 일일이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매번 자각하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도 누구에겐가, 그 무엇에겐가 ‘수건’일 때가 있다. 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있어야 할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그 누구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는 화자의 고백을 자책이 아니라 겸허한 자기성찰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니, 수건을 단지 수건으로만 보는 우리의 안이한 생활에 대한 경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문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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