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81>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
- 살아가는 길 잃은 35세 ‘먹물’
- 크레타섬 향하며 ‘조르바’ 만나
- 용병 외판원 뚜쟁이 도공이자
- 살인도 결혼도 다 한 그에게
- ‘아집’ 깨고 세상 즐기는 법 배워
- 카잔차키스, 실제 인물 모델로
- 삶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훈수’
- 그리스 정교 비판 많아 금서 돼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버릇 말이요. 자, 젊은 양반, 결정해 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얼마나 많은 이가 불끈 용기를 냈을까. ‘소심한 인생’을 향해 조르바가 내지르는 이 호통을 떠올리며. ‘조르바 어록’은 파도가 넘실대는 인생 항로를 밝히는 등댓불이다. ‘나’에게도 그랬다. 세상을 들이받으며 사는 잿빛 숫양 같은 조르바는 안면 튼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훈수질이었지만 밉지 않았다.
▮‘나’와 만난 조르바
그리스 피레에프스 항구 카페에서 크레타섬행 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단테 ‘신곡’ 문고판을 읽는데 뒤통수가 근지럽다. 돌아보다 마주친 눈 임자가 알렉시스 조르바. 대뜸 다가와 자신을 고용하라고 소리친다. “나, 수프도 잘 끓여.” 머리통 크고, 후리후리한 중늙은이. 나중에 안 나이가 65세였다. 세상 풍상은 다 겪은 형색이다. 잿빛 고수머리, 번뜩이는 조그만 눈, 광대뼈는 왜 튀어나왔나.
‘먹물’인 나는 35세인데 요즘 살아가는 길을 잃었다. 낯선 곳에서 펜대 꺾고 산다면, 뭐라도 될 듯해 이 섬으로 왔다. 리비아와 면한 해안에 자리 잡은 갈탄 폐광을 일구어 볼 참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수익이 난다면 자본에 사회주의가 붙은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었다. 그런 궁리 중에 조르바를 맞닥뜨렸다. 광부 십장 출신이라니 마음에 든다.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섬 해안에 오두막을 짓고 살게 됐다. 예측불허인 크레타섬 생활이 기다릴 줄이야. ‘알렉시스 조르바, 삶과 모험 개봉박두’였다. 과장이 아니다. 용병 외판원 뚜쟁이 도공…. 살인부터 결혼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는 그가 나에게 들려준 인생 활극은 드라마 저리 가라다.
살아 보니 크레타섬은 용광로였다. 생각지 못한 사건들이 불똥을 날렸다. ‘우리 둘’이 마을 과부 두 명과 나눈 연애는 애교 수준이다. 대낮 마을 한복판에서 여자 목울대를 따다니! 그것도 동네 어른이란 마브란도니 영감이 말이다. 아들 파블리가 글쎄, 짝사랑한 마을 과부에게 차였다고 다짜고짜 죽어버렸다. 자기가 무슨 심청이라고 바다에 몸을 던지나. 오로지 조르바만 이 복수 살인극을 막으려 날뛰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주민은 그렇다 치고 이곳 수도사까지 ‘엽기’인 건 이해가 안 간다. 신부란 작자가 자신을 거절하는 젊은 수도사를 죽여버리는 데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런 죄악에 열 받은 수도사가 없지는 않았다. 그도 꼴통인지라 수도원에 확 불을 싸질렀다. 속으로 얼마나 통쾌한지!
이곳 삶은 인간 공부에 직방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제 이런 질문에 척 답하게 됐다. 머리로 살아온 내가, 가슴으로 날고 기는 조르바에 치이다 보니 그렇게 돼버렸다. 일단, 먹고 마시는 행복을 모르는 자는 불행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사람이 피가 미지근해선 안 된다고. 관찰에 그치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
조르바만 그런 게 아니다. 크레타 주민이라면 일단 행동하고 본다. 크레타섬에서 태어나고 유년을 보내면 ‘몸속에 사는 악마’가 살게 된단다. 섬사람들은 그놈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카바레 가수였던 마을 과부 오르탕스 부인은 갑자기 열병을 앓다 세상을 떠나기까지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아직 죽지 않았는데 곡장이는 왜 몰려들어? 추모객은 아예 약탈자들이다. 오르탕스 부인이 보는 데도 집닭을 잡아 술판을 벌이고, 문짝과 집 안 물건을 몽땅 들고 튄다. 그녀 애인인 조르바만 눈물 배웅이다. 이런 게 인생일는지.
누구보다 불가사의한 매력이 가득한 인물은 조르바다. 정열 가득한, 위대한 자유인. ‘나’를 ‘두목’이라고 부르는 그는 손이 커다랗고 거칠었다. 곡괭이질만 잘할 듯한데, 양금(洋琴)인 산투르도 잘 다뤘다. 악기 하나 연주 못 하면 그리스 사내가 아니라는 지론. 그는 정수리가 희끗희끗한 어린애였다. 매일 보는 세상 만물을 새로워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호기심이 가득한 인간 활화산인 그를 ‘인생 스승’으로 대하게 된다. 지금까지 산 삶을 걸레로 지워버리고 조르바란 인생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진짜 알파벳을 배우고 싶었다.
그는 평소엔 희희낙락하다가도 일하게 되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엉겨 붙는다. 왼손 검지가 반쯤 없다. 조르바는 한때 옹기 만들기에 빠졌다. 녹로 돌릴 때 검지가 걸려 거추장스럽다며 덜렁 잘라버렸다. 놀 때도 마찬가지다. 연인인 늙수그레한 오르탕스 부인을 “자기, 물 찬 제비!”라고 부르며 꼬셨다. 그는 말로 표현 못 하는 감정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럴 때 조르바는 춤춘다. 중력과 싸워 이기려는 망아지처럼 땅을 박차고 오른다. 흥이 절정에 오르면 산투르를 연주한다. 이리되면 누가 말을 건네도 못 알아듣는다.
▮조르바에 이끌려 세상에 나오다
주인공 ‘나’는 조르바를 통해 삶을 즐기는 법을 배웠다. 갈탄을 캐고 돌아온 그와 음식을 나눠 먹고 세상 얘기를 듣는 게 낙이었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않은 조르바는 적절하게 맺고 끊으며 세파를 능숙하게 헤쳐 나갔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지금까지 헛살았다며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조르바와 몇 달만 같이 살았더라면 깨우쳤을 그 인생 바다 수영법을 내 혼자 익힌다고 수십 년을 날려 버렸으니 분통 터진다.
이상을 꿈꾸는 나는 현실주의자 조르바에게 자주 깨졌다. 내가 섬사람들 무지를 깨우치는 데 관심을 두자, 그건 괜한 짓이라며 비웃었다. 이 세상이 지옥인데 괜히 그걸 깨닫게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다. “그리고, 보여줄 별천지라도 있어요?” 나는 즉각 꼬리를 내렸다. 또 하루는 내가 인부들을 다정하게 대하자 조르바는 그렇게 말랑하게 보이면 코 베인다고 혀를 찼다. “인간은 엄청난 짐승이란 말입니다. 믿을 건 자신뿐이며 나머진 허깨비요. 내가 죽으면 만사가 끝!” 그를 이기주의자라고 빈정대면서도 나는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번 꼬집힌 뒤 마음에 새겼다. 첫째, 형이상학적 언어에서 걸어 나오고 헛된 염려를 접기. 둘째, 앞으로 인간과는 직접 접촉하기. 그런데 아직 먹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조르바는 이렇게 백면서생인 나를 아집이라는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도록 돕는 어미 닭이었다. 어느 날 나는 다시 철필을 들었다. 머릿속을 비운 상태에서 밤새며 글을 휘갈겼다. 크레타섬에서 이전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살아보려 했지만, 조르바 덕에 예전처럼 글 쓰는 나로 돌아왔다. 내가 쓴 글은 부처 일대기였다.
그날 밤을 평생 못 잊을 터이다. 마을 청년 파블리를 자살케 했다며 손가락질받은 마을 과부를 편들었던 나는 그녀와 부활절 밤을 함께 보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두막으로 돌아온 난 원고를 꺼내 마지막 문장을 또박또박 쓰고 서명한 후 원고 뭉치를 묶었다. 나 자신과 벌여온 기나긴 싸움을 포박하는 승자처럼.
이제 난 크레타섬이 더는 그리스신화 속 신들이 차지한 장소가 아닌 걸 안다. 이 섬은 원래 주인인 인간에게 되돌아왔다. 날것 그대로인 삶이 넘실대는 이 섬에서 신은 설 자리가 없다. 크레타섬이여, 안녕~. 난 이제 떠난다.
카잔차키스는 사업하며 만난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아 1946년 이 고전을 썼다. 그리스 정교를 불편케 하는 대화와 장면이 자주 나오는 이 소설에 금서란 낙인이 찍혔다. 저자도 파문당해 죽은 후 아테네에 묻힐 수 없었고 고향 크레타섬에 안치됐다. 카잔차키스 묘비 뒤쪽엔 파문당한 자임을 나타내는 나무 막대기 십자가가 세워져 조문객을 맞는다. 그 십자가 아래, 묘석 뒷면엔 저자가 생전에 써둔 비명(碑銘)이 그리스어로 새겨졌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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