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동만 남았던 경복궁 전각… 광복 100주년엔 205동 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2024. 1. 1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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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의 뉴스 읽기] 제모습 되찾는 서울 궁궐들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돈의문(서대문)을 2035년까지 복원하는 서울시의 ‘경희궁지(慶熙宮址) 일대 종합공간 구상’이 지난 15일 공개됐다. 서울역사박물관 뒤에 있는 흥화문(경희궁 정문)을 원래 자리인 구세군회관 옆으로 옮기고 새문안로를 지하차도로 바꾼 뒤 그 위에 돈의문을 세우는 것이 골자다. 조선 5대 궁궐 가운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기거했던 창덕궁을 제외한 경복궁·덕수궁·경희궁·창경궁은 일제하에서 원형이 크게 훼손됐다. 이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역사(役事)가 진행되고 있다. 경희궁터 구상 공개를 계기로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그간 추진해 온 궁궐 복원 과정과 향후 일정을 점검했다.

그래픽=박상훈

◇경술국치 이전에 훼손 시작돼

1868년 중건 당시 경복궁은 전각만 500여 동 7000여 칸이 들어선 위엄 서린 궁궐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조선의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경복궁부터 망가뜨렸다. 경복궁 전각 3분의 2가 경술국치 이전에 뜯겨나갔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현장이었던 건청궁도 1909년 사라졌다.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5월 1일 자 ‘경복궁 없어지네’ 기사에서 ‘전국민력을 다하여 건축하고 몇십 년래로 존엄지지로 중히 여기던 경복궁이 을미년 이후로 참혹히 됨을 모두 아는 바, 궁내부가 그 궁전 4000여 칸을 방매 훼철했다’고 비분강개했다.

총독부는 합방 후인 1915년 9월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며 세자 부부의 침전인 자선당 등 전각 15동을 뜯어냈다. 전시장 부지 마련이란 구실을 달았다.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던 흥례문도 이때 헐렸다. 그 자리에 훗날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섰다. 1917년 창덕궁이 불타자 경복궁의 국왕 부부 침소였던 강녕전과 교태전 및 여러 부속 건물을 해체해 창덕궁 침소 재건에 썼다. 흥복전을 들어낸 자리에 연못을 파고 일본식 정원도 조성했다. 광화문은 1926년 총독부 청사가 완공되자 전면을 가린다는 이유로 해체됐다. 총독부가 아예 없애려 했지만 일부 일본 학자가 반대하자 경복궁 동쪽 건춘문 주변으로 옮겼다. 그 후 1929년 열린 조선박람회 출입구로 쓰였다. 경복궁 담장도 헐리며 담장 일부였던 동십자각이 지금처럼 따로 떨어지게 됐다.

그래픽=박상훈

◇박람회만 6번 열고 그때마다 전각 뜯어내

총독부 청사 준공 후 경복궁엔 일본인을 위한 야구장과 테니스장, 400m 육상 트랙이 들어서고 청사 양측에 일본 나무가 식재됐다.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은 1932년 해체 후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인 박문사로 옮겨져 부엌으로 쓰였다. 경복궁 박람회는 1915년 공진회부터 1935년 대한제국 병탄 25주년 박람회까지 6번 열렸다. 그때마다 전각이 헐렸다. 서십자각은 전차 노선과 겹친다는 이유로 부쉈다.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일부가 전차의 진동으로 무너지자 몽땅 헐어버렸다. 이를 본 일본의 저명한 고건축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는 ‘영추문을 애도하며’라는 글에서 ‘상당수를 잃어버릴지도 모를 조선의 아름다운 건축에 대한 주의를 촉구한다’고 총독부의 잇단 고궁 훼손을 비판했다. 덕수궁(옛 경운궁)도 크고 작은 화를 당했다. 1920년 덕수궁을 관통하는 새 담장길이 조성되며 궁이 둘로 쪼개졌다. 덕수궁 선원전은 해체 후 창덕궁으로 옮겨졌고 빈터는 조선저축은행 등에 팔렸다. 고종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거나 국빈 숙소로 쓴 돈덕전도 헐렸다.

◇덕수궁 경희궁도 제모습 살린다

1960년대 경제가 일어서며 고궁의 옛 모습을 되살리자는 여론이 일었다. 6·25 때 문루가 불탄 채 방치됐던 광화문이 첫 복원 대상으로 정해졌다.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1968년 콘크리트로 복원됐고 경복궁 전면으로 돌아왔다. 8·15 광복 후 경복궁은 온통 공터였다. 근정전과 경회루, 향원정 등 36동만 남아 있었다. 여기에 169동을 새로 짓거나 다시 지어 총 205동으로 늘리는 대역사가 1990년 첫 삽을 떴다. 고종 중건 당시의 40% 규모다. 1차로 2010년까지 89동이 복원됐다. 근정전 뒤 허허벌판에 강녕전과 교태전 등 침전이 들어섰다. 총독부 청사를 허문 자리에 흥례문도 복원됐다. 일본에 팔려갔다가 관동 대지진 때 소실된 자선당도 원래 자리에 다시 지었다. 1차 복원의 대단원은 광화문이 장식했다. 원래 모습인 목조로 다시 지었고, 첫 복원 때 근정전에서 흥례문으로 이어지는 경복궁 축에서 3.75도 이탈했던 오류도 바로잡으며 제자리를 되찾았다.

2011년 시작된 2차 복원으로 지금까지 전각 23동이 추가 복원됐다. 이 중 지난해 말 완공된 계조당은 문종이 세자 시절 아버지 세종 대신 정사를 돌봤던 조선 유일의 세자 집무실이었다. 주말에 가보니 단청 도색이 안 돼 원목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전의건 사무관은 “채색하려면 목재가 다 마를 때까지 몇 년 더 기다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승정원을 포함한 궐내각사와 오위도총부 등 나머지 57동도 2045년까지 복원된다. 지난해 낙서 훼손을 당한 영추문도 복원 대상이다. 1975년 콘크리트로 지은 것을 허물고 광화문처럼 목조로 재복원한다. 일제가 종묘관통도로(현 율곡로)를 내며 사라졌던 창경궁과 종묘 사이 담장은 재작년 율곡로를 지하화하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두 곳을 오갈 수 있게 담장에 냈던 북신문도 되살렸다. 서울시는 돈의문도 새문안로를 지하화하고 그 위에 북신문과 같은 방식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덕수궁에선 선원전 등 59동이 2039년까지 복원된다.

문화재 복원에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간다. 원래 모습을 되찾는 것 못지않게 활용도 중요하다. 경복궁 소주방과 건청궁은 복원 후 각종 궁궐 체험 행사장으로 쓰인다. 고종의 서재였던 집옥재는 새 단장 후 일반에 개방됐다. 지난해 재건된 덕수궁 돈덕전에선 대한제국 영빈관이었던 옛 기능을 되살리자는 취지로 최근 한독 수교 140년 기념 전시회가 열렸다.

◇2차대전 때 바르샤바 파괴당했던 폴란드, 수도 재건하며 옛 궁성도 복원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는 2차대전으로 폐허가 됐다. 특히 아름다운 옛 왕궁과 말발굽 모양의 원형 요새 바르바칸, 바로크 양식 건물이 즐비했던 구도심은 9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폴란드는 전후 수도 재건을 시작하며 현대식 신도시 건설이 아닌 원형 복원을 목표로 정했다. ‘구도심은 폴란드인의 정신’이라는 재건 구호에 바르샤바 시민도 동참했다. 파괴되기 전 거리와 집을 찍은 사진, 옛 모습을 담은 풍경화와 그림엽서 등 사소한 것까지도 복원에 참고하라며 내놓았다. 나치와 소련이 약탈해간 문화재는 돌려받거나 그게 안 되면 되사서라도 복원에 투입했다. 옛 왕실의 상징이었던 86개의 은제 독수리 문양도 돌려받아 궁궐 복원에 썼다. 재래시장과 성당도 고증을 거쳐 전쟁 이전 모습을 되살렸다. 이런 노력 끝에 바르샤바 구도심은 198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동독 공산당 청사를 부수고 2020년 복원한 베를린궁. /픽사베이

전후 동서로 분단됐던 독일은 베를린장벽 붕괴 후 프로이센의 옛 도읍인 베를린을 통일 독일의 수도로 정하면서 베를린 왕궁도 복원했다. 1500년대부터 짓기 시작해 1901년 완공된 역사적 건물이었지만 1950년 동독이 제국주의의 잔재라며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없애고 그 자리에 동독 공산당사를 지었다. 통일 독일 정부는 2008년 옛 공산당사를 철거하고 2013년 왕궁 복원 공사에 들어갔다. 2020년 복원된 왕궁은 최고 수준의 복원 기술자와 건축가, 예술가 등이 투입된 독일 건축·문화 역량의 총화로 꼽힌다. 지금은 관광 명소이자 행사장으로 사랑받는다. 베를린 궁의 문화·예술·학술 행사를 총괄하는 훔볼트 포럼은 아고라 광장에서 연극과 영화를 상영하거나 음악회를 개최하고, 학문의 장에선 학술행사와 정치 토론회도 연다. 프랑스는 베르사유 궁의 화려했던 마리 앙트와네트 방을 복원했다. 부르봉 왕가의 사치 흔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18세기 프랑스 궁정의 수준 높은 미적 성취를 되살리자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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