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방향이 없으면 열심히 뛰어도 방황이다

경기일보 2024. 1. 1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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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두영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약 20년 전 ‘부자되세요’란 말이 덕담처럼 쓰인 이래 행복에 대한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소위 ‘웰빙, 힐링, 명상, 소확행, 욜로, 자신을 사랑해주렴, 꽃길만 걷자, 경제적 자유 ... 같은 말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이 말하는 행복론에 따라 ‘꽃길을 걷기’ 위해,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데 의문스럽다. 그런 ‘세상의 행복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정말 더 행복해졌을까? 더 충만해졌을까?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건지고 ‘좋아요’를 받은 날, 하루 잘 먹고 놀며 ‘소확행’을 느낀 날, 그들은 언뜻 만족을 느끼는 것도 같다. 몸매를 가꾸고 보디프로필을 찍은 날, 명상하고 맑은 정신을 유지한 날, 일이 계획대로 잘 풀린 날, 만족스러운 것도 같다. 평화롭고 안락한 그 어느 날, 만족스러운 것도 같다. 한데 그러던 이들이 어느 날 내적 공허함을 고백하고, 어떤 경우엔 갑자기 무너지는 경우까지 보게 된다. 특히 삶에 풍랑이 닥칠 때, 추구하던 자기만족을 느낄 수 없게 됐을 때, 봄은 가고 꽃길은 사라졌을 때, 그들은 당황하고 분노하며 ‘내 삶은 불행하다’고 선언하며 세상을 원망하기도 한다.

자신을 잘 돌봐주는 일은 중요하다. 필자도 자신을 잘 돌보려 한다. 그런데 그것이 ‘내 삶의 이유’,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아니다. 나는 내 일신의 안락과 만족을 위해 이 세상에 보내진 게 아니다. 자신을 잘 돌보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다만 그게 ‘전부’라면, 그게 삶의 목적이라면 그는 대체 어딜 향하고 있는가를 얘기하는 것이다. ‘방향’ 자체가 없거나 모호하면, 혹은 기껏 설정한 방향이 결국 자기 안에 맴도는 것에 불과하다면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애초에 ‘방황’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편적인 행복만을 위해 사는 사람, 삶의 목표가 안락함, 자기만족, 힐링, 자신을 아껴주는 것인 사람은 충만함을 알기 어렵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풍랑의 때, 꽃들이 사라진 날, 그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풍랑에도 꺾이지 않는다. 풍랑을 돌파한다. 그에겐 ‘방향’이 있다. 바로 거기서 여유와 유머도 흘러나온다. 그는 자신의 생을 만끽하면서도 자신이 받은 생명을 무언가,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쓰고자 한다. 그는 ‘자신을 넘어서’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위해’ 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오늘 하루가 꽃길이 아니어도, 심지어 십자가 길이어도 괜찮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늘 ‘내 기분이 좋았는지’가 아니다.

나는 왜 이 세상에 왔는가? 신은 왜 나를 이 세상에 보냈는가? 내 소명은 무엇인가? 아니, 그런 것 다 떠나서 나는 정말 어떻게 살고 싶은가? 아니, 애초에 나는 자신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 자신을 귀한 품위를 지닌 존재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동물로 여기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그것은 정말 그럴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니라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싶은가?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은가? 질문을 시작했다면 비로소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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