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10. 태백산: 설산에서의 기도
홀로 떠난 태백산서 눈꽃산행 만끽
따스한 햇살 아래 눈 밟는 소리 가득
15년 만의 태백산 등산 초보시절 떠올라
화방재~만항재~장군봉 묵묵히 정상까지
원하는 일 의심 없이 나아가는 용기를
새해 잘 맞으셨는지요? 갑진년 값지게 보내시라는 안부를 주고받는 가운데 2024년이 밝았습니다. 그리고 그사이 보름이 지났습니다.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일은 없습니다. 여전히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내는 중이고, 그렇게 어느덧 1월의 절반을 보냈다는 것이 잠시 당황스럽습니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말을 습관처럼 해서 이제는 그런 인사가 조금 고민 없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떤 시간은 조금 느리게 흘러갑니다. 가만히 잘 생각해보면 당신에게도 분명 그런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산에서 보내는 시간이 그렇습니다. 당신도 그렇다니 반갑습니다. 우리에게 통하는 점이 한 가지 있네요. 하지만 그 한 가지가 다른 여러 가지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마 많은 것이 닮았을 것입니다. 새삼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당신이 궁금합니다. 올해는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올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정초에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까 합니다. 새해를 맞으러 태백산에 가려고 산악회 버스를 기다리던 아침이었습니다. 별일이 없다면 크고 높은 산에서 1월 1일의 태양을 맞이하려고 애쓰는 편인데 올해는 12월 31일에 일이 있어 가지 못했어요. 조금 늦은 감이 있으나 1월이 가기 전에 산에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배낭을 꾸렸습니다. 그렇게 불현듯 결정한 태백산 산행이었습니다. 혼자 훌쩍 다녀오려니 먼 곳까지 이동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오랜만에 산악회에 합류했습니다.
다행히 아직 겨울입니다. 기후 위기로 겨울이 짧아지고 남쪽은 벌써 봄이 온 듯 화사한데 강원도 산간 지방에서는 아직 눈을 볼 수 있습니다. 산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일출 산행만큼 설레는 겨울 산행이 바로 설산 산행입니다. 눈 쌓인 태백산을 가슴에 품고 아침 7시 산악회 버스에 올랐습니다. 같은 마음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는 장면이 모처럼 흐뭇했습니다. 옆 사람과 눈인사를 나눴습니다. 그러고 한 5분쯤 갔습니다. 한데 옆 사람이 소백산 지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눈치가 빠른 당신이라면 짐작했을 것입니다. 설산에 가려는 등산 동호인으로 인산인해인 집합 장소에서 마음이 급한 나머지 제가 ‘태백산’ 버스가 아닌 ‘소백산’ 버스를 타고 만 것입니다. 하필 버스 차량 번호도 비슷했고, 출발 시간도 같고, 무엇보다 산 이름이 딱 한 글자만 달라 대충 보고 의심 없이 소백산 버스에 오른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고요? 하늘이 도와 태백산 버스가 밀려서 소백산 버스 뒤에 있었고, 저는 중간 정류장에서 내려 태백산 가는 버스로 옮겨 탈 수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엉뚱한 산에 도착할 뻔했습니다.
해발 1566m의 태백산은 겨울 산행 1번지입니다. 산 이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자그마치 ‘큰 대(太)’ 자에 ‘흰 백(白)’ 자를 씁니다. 한겨울 눈꽃은 태백산의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태백산은 백두대간의 산입니다. 한반도의 척추를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 위에 태백산이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낙동정맥은 태백산에서 갈라지고 우리나라의 젖줄인 한강은 태백 검룡소에서, 낙동강은 태백 황지에서 발원합니다. 태백산은 우리나라에서 참 중요한 산입니다.
정오경 화방재에서 태백산 산행을 시작합니다. 화방재는 태백산 북서쪽에 있는 해발 939m의 높은 고개입니다. ‘태백의 지명유래’에 따르면 봄 무렵 진달래와 산철쭉 등으로 붉게 타오른 이 일대 광경이 흡사 꽃방석 같다고 해서 화방재라고 불렀다는 설이 전해집니다. 이곳에서 만항재를 지나 함백산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만항재와 함백산 또한 백두대간입니다. 어평재휴게소에 들러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몸을 데운 뒤 천천히 태백산으로 들어갑니다.
산은 따스합니다. 오후로 넘어가며 태양은 햇살을 아낌없이 산 위에 흩뿌리는 중입니다. 마침 날씨도 좋습니다. 청명한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습니다. 그리고 바람도 없습니다. 뽀드득뽀드득…. 길 위에 깔린 눈을 밟을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만이 이번 산행의 유일한 동행입니다. 한 주 전 폭설이 내리고 잔뜩 얼어붙었던 산은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상고대(나무나 풀 등의 물체에 서리가 들러붙어 얼어붙은 것)가 피었을 나뭇가지에는 고드름이 얼어 있습니다. 고드름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그 안에 작은 세상이 피어 있습니다.
태백산을 제대로 오르는 것은 15년 만입니다. 2009년 1월쯤 설산 산행을 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산악회를 통해 왔는데 아이젠도 없던 등산 초보 시절이라 같이 오른 일행이 여분을 빌려줘서 겨우 정상까지 올랐지요. 아이젠을 찼다는 것만으로 한껏 격양된 채 산을 올랐습니다. 마치 어려운 산을 오르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때 생각을 하니 그날의 추운 날씨와 양 볼을 할퀴던 칼바람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천제단의 거대한 비석이 마치 냉동고처럼 보였습니다.
산령각을 지나고 한참을 걸어 유일사 분기점에 도착합니다. 유일사 주차장을 통해 한 무리의 등산객이 떠들썩하게 올라오는 중입니다.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100m쯤 내려가면 유일사입니다. 겨울 산사의 장면을 놓칠 수 없어 잠시 들릅니다. 산사는 포근합니다. 지붕마다 하얀 눈을 한가득 이고 지고 있습니다. 법당 안을 들여다보니 불자 한 사람이 곡진히 절을 올리고 있습니다. 갈 길이 멀기에 문밖에서 합장하고 다시 능선에 붙습니다. 산령각에서 잠시 스쳤던 20대 친구들이 이제 막 사거리로 내려서고 있습니다.
정상에 다가갈수록 조망이 터지는 곳마다 이 일대 산야가 파노라마로 들어옵니다. 함백산, 구운산, 청옥산, 연화봉 등의 고산 준봉을 바라보니 백두대간답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천년 주목과 고사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바람의 풍경은 태백산의 얼굴입니다. 화방재에서 출발한 지 2시간 정도 지나 장군봉에 이릅니다. 드넓은 정상은 작은 운동장 같습니다. 주말인 까닭에 정상석 앞으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습니다. 번거롭더라도 특별한 하루를 기념하고 싶은 마음이겠지요. 그렇다면 오늘은 작은 운동회날입니다.
이윽고 천제단에 이릅니다. 천제단은 오래전부터 하늘에 올리는 제사의 제단이었습니다. 태백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불리는 이유이지요. 그런 까닭에 천제단은 정상인 장군봉보다 더 정상 같습니다. ‘한배검’이라고 적힌 제단에는 지금도 속인들이 제사를 지낸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 앞에 서니 하늘과 소통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올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저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음이 원하는 일 앞으로 의심 없이 나아가는 용기 말입니다. 저는 앞으로 무엇을 원하게 될까요? 오후의 문턱을 넘어 문수봉으로 향합니다. 작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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