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모비 딕과 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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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법무부 장관 재직 마지막 날 한 예비 고등학생에게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백경·白鯨·1851)을 선물한 일이 알려졌고, ‘모비 딕’이 갑자기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동훈 위원장은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 내 배에 태우지 않겠다”는 소설 속 일등항해사 스타벅(커피 체인점 ‘스타벅스’의 유래가 된 인물)의 말을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에 대해 “모비 딕의 리더십은 선원을 모두 죽이는 리더십”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었습니다. 인간과 신의 대립부터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경고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해석이 이뤄진 멜빌의 ‘모비 딕’을 단지 소설 속 줄거리로만 따져 정치적 공격에 이용한 셈입니다. 미국 역사가(문학평론가가 아닙니다) 나다니엘 필브릭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비 딕은 진정한 서사시다. 창조신화, 복수 설화, 민간 전설, 창조하고 또 파괴하고자 하는 상충하는 충동을 엮어 이 모든 것을 지구의 광대한 대양을 배경으로 펼치며 미국의 강력한 원형을 거의 전부 구현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이것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장면인데?
그건 23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2001년 4월 11일 다이빙궈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방한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이인제 민주당 최고위원에게 ‘출사표(出師表)’가 담긴 죽간을 선물했습니다. 그러면서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민주당 한 대선 주자 진영의 관계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신문에 보도됐습니다.
“출사표를 낸 제갈공명은 곧바로 죽었다!”
이제 제갈양(諸葛亮)의 ‘출사표’가 과연 어떤 텍스트였는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선제(先帝·유비)께옵서는 창업하신 뜻의 반도 이루지 못한 채 중도에 돌아가시고, 이제 천하는 셋으로 정립돼 익주가 매우 피폐하니, 참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급한 때입니다. 그러나 폐하를 모시는 대소 신료들이 안에서 나태하지 않고 충성스런 무사들이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음은 선제께서 특별히 대우해 주시던 황은을 잊지 않고 오로지 폐하께 보답코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 문장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 것’이란 말도 있었습니다. 숱한 전설과 신화로 덧칠된 제갈양이란 인물의 사적도 이 문장에 와서만큼은 뚜렷한 역사적 사실의 무게로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국가의 위급존망(危急存亡)은 이 거대한 사회에 속한 개인 누구에게나 실존적 갈등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국가와 민족주의가 싫다’라며 무슨 크게 새로운 진실이나 밝혀낸 듯이 목소리를 높이는 21세기의 문화논객이란 자들도 따지고 보면 다 국가의 녹봉으로 환원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 위에 이름 석 자를 내걸고 살아가는 자들이 아닐까요. 그들은 애써 부인하고 싶겠지만 말입니다.
다시 출사표를 들여다보면 문장 한 줄 글자 한 자에 애절하고 절박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이 면면히 살아 숨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장은 또 어떻습니까. “현신(賢臣)을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함은 선한(先漢)이 흥륭한 까닭이고, 소인을 가까이하고 현신을 멀리함은 후한(後漢)이 기울어지고 무너진 까닭입니다…”
“신은 본래 포의(布衣)로 몸소 남양에서 밭을 갈고 구차하게 성명을 난세에 보전하고 명문 영달을 제후에 구하지 아니하였더니, 선제께서 신을 비천하다 아니하시고 외람되게 스스로 몸을 굽히셔서…”
“명을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하신 효과가 없어 그로써 선제의 밝음을 상할까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황제와 귀족만을 위한 충정이었겠습니까. 사직(社稷)과 민초들을 우려하는 그의 마음씀인 것이라고 봐야지요.
촉한, 즉 익주의 피폐한 국력으로 중원의 위(魏)를 정벌한다는 것은 허황된 만용으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대소(大小)가 언제나 강약(强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의 나선형적 진보를 가져오는 원동력은 헤겔이 목에 힘주고 말한 ‘절대 정신’과 같은 어마어마한 개념이 아니라 어느 시대마다 있었던 한 줌의 몽상가(dreamer)들이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위에 나온 어느 정치인의 독설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출사표 죽간을 선물한 까닭은 ‘만세에 귀감이 될 충정을 본받아 국민에게 정성을 다하는 정치를 하시라’는 덕담이었을 것입니다(그런 선물을 줄 자격이 있는가란 문제와는 별개로).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치인은 국민을 대하는 충정따위는 관심이 없다는 , “제갈양이야 결국 천하를 얻지 못하고 오장원에서 병사하지 않았는가”라며 선물의 행간을 억지로 찾아내 비아냥거립니다. 사실 ‘곧바로’라는 말도 우습습니다. 제갈양이 죽은 것은 전출사표 이후 온갖 각고면려를 겪은 뒤 8년이었습니다. 현재 한국의 한 정권 단위보다 긴 세월입니다.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정 따위는 관심없다. 천하를 얻었느냐 그렇지 못했는가가 문제다.’ 어찌 보면 솔직한 속내를 드러낸 것 같기도 하지만,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신을 멀리함이 후한의 기울어진 까닭”이라는 출사표의 한 대목이 생생히 되새겨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소설 ‘모비 딕’의 선장 에이허브는 한 쪽 다리를 잃었으면서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계를 돌며 온갖 고군분투를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를 향해 돌진하고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리라. 지옥 한복판에서라도 너를 향해 작살을 던지고, 가눌 수 없는 증오를 담아 내 마지막 숨을 너에게 뱉어 주마.” 설령 소설 속 인물이라 해도 중요한 국면마다 어렵지 않은 길을 택하면서 온갖 내로남불을 일삼고 가붕개들을 모욕한 사람의 경우라면 쉽게 평가절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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