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새해, 눈 오는 날, 버스정류장에서

기자 2024. 1. 1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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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위에 높이 뜬 달에 올라가 지구를 본다면 내려다보일까. 그럴 리가, 달도 분명 지구를 우러르고 있다. 우주에서 상대를 대접하는 방식은 서로를 정중히 받드는 것. 눈도 하늘의 그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솟구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걸 낮디낮은 곳, 지구라는 블랙홀에 빠진 우리가 거대한 착각 속에 내리는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아무튼 눈이 펑펑펑 왔다. 눈은 그냥 오지 않는다. 눈은 짐짓 세상의 무심하던 곳을 햇볕 든 쥐구멍처럼 뜻밖의 장소로 변하게 한다. 몸의 가장 변방인 발바닥도 그중의 하나다. 듣는가, 눈길 걸을 때마다 찍히는 발바닥의 힘찬 주장을. 네 존재의 구멍을 틀어쥐고 있는 건 나야!

차는 안 오고 집으로 어서 가고 싶은 마음들이 부딪히는 버스정류장도 그런 곳이다. 다른 것과 다른, 가장 큰 눈송이 하나 골라서 입으로 들이면 마음속 생각 하나가 밖으로 나온다. 나에겐 버스정류장에 대한 오래된 생각이 있다. 공중화장실 근처 나무들의 때깔이 좋듯 버스정류장의 가로수는 왜 잎이 더 무성한가. 이 근방에서는 공기 중의 근심 농도가 짙어서일까. 왜 이곳에선 구름도 멈칫, 공손하게 떠도는가. 버스는 아니 오고 심심함을 견디다 고향으로 달려간다.

어릴 적 문명의 전진기지였던 시골 버스정류장. 차 시간 되면 아연 북적거리고, 대처로 나가는 기운이 고여 있는 곳. 이제 고향에 가면 힘없이 비켜가는 군내버스에 자꾸 눈길이 간다. 버스는 승객 대신 적막을 싣고 달린다. 저녁에 도착하여 만난 막차, 나이 지긋한 운전수와 빈 좌석뿐. 석양을 업은 의자의 그림자만 차 안에 길쭉하였지.

어리석게도, 너무 늦게, 그 이름을 알게 된 철학자 김진영(1952~2018)의 마음일기를 읽는다. ‘조용한 날들의 기록.’ 철학자도 정류장에서 많은 생각을 공글렸음일까, 버스가 가끔 등장하였다. “새해 아침. 파란 버스가 반짝이면서 혼자 달려간다.” “한파. 꽁꽁 얼어붙은 아침. 멀리 버스정류장. 진하게 찍은 마침표처럼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초록빛 버스가 다가선다. 그러자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마침표들. 세상에 영원히 죽은 것은 없는 걸까. 때가 되면 모두들 다시 살아나는 걸까.”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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