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석의 문화유랑]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2023년 극장에서 보는 마지막 영화로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를 선택했다.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을 받은 <마지막 황제>, 데이비드 보위와 함께 출연도 한 <전장의 크리스마스>, 지난해 11월 개봉하여 40만명이 넘게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 등 많은 걸작 영화음악을 작곡한 뮤지션 사카모토 류이치의 연주를 담은 영화다.
사카모토는 2023년 3월28일, 71세로 세상을 떴다. 몇년간 대장암으로 투병을 하면서 죽음을 예감한 사카모토는 마지막으로 피아노 연주 영상을 찍었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피아노만이 존재하는 무채색 스튜디오에서 20곡을 연주하는 사카모토의 모습을 담은 영화다. 8일간 하루 3곡씩 2, 3번의 테이크로 찍었다. 카메라는 담백하다. 그가 연주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때로 얼굴이나 손으로 다가간다. 만족스러운 연주일 때 사카모토의 얼굴은 부드러워지고 절로 미소가 피어난다. 건반을 두드리는 손은 경쾌하고 섬세하다. 하지만 때로 힘에 부친 듯 숨결이 약간 거칠어진다. 얼굴에 땀이 맺힌다.
사카모토의 연주를 103분 동안 듣는 것은 황홀하다. 직접 공연장에서 들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세상을 뜬 그의 연주를 이토록 ‘리얼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집에서 TV나 프로젝터로 보는 것과는 다른 경험이다. 미국에서 지난해 10월12일 개봉한 테일러 스위프트의 공연 실황을 담은 <테일러 스위프트: 디 에라스 투어>는 가수의 공연 실황 영화로는 처음 수익 1억달러를 넘어섰다. 총 2억5000만달러를 웃돌았다. 극장에서 음악과 무용 공연, 스포츠 경기 등을 함께 즐기는 시대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를 본 관객 대부분은 이미 사카모토 류이치를 알고 있고, 아마도 좋아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연주 장면만으로 채워진 영화를 보기 위해 기꺼이 극장을 찾았겠지.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아직 살아 있다면 언젠가 그의 연주를 직접 보고 들을 꿈을 간직하겠지만, 이미 떠난 그가 저승에서 연주한다 해도 이곳에서 들을 방법은 없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를 극장에서 보는 이유다.
하나 더 있다. 집에서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를 본다면 아무리 화면과 사운드 시설이 극장과 가까운 정도라 해도 한 번도 쉬지 않고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도중에 휴대전화를 보며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 화장실이라도 한 번 가지 않았을까.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봤을 수도 있다. 극장에서는 다르다. 완벽하게 집중한다. 블록버스터를 보러 온 관객이 아니라 사카모토 류이치의 연주를 들으려 찾아온 팬들이다. 잠깐 물을 마실 때에도 조심스럽고, 휴대전화를 꺼내는 일도 없다. 오로지 영화에 집중하기 위해서, 이 경우에는 사카모토의 연주에 몰입하기 위해서 ‘극장’이라는 공간의 입장료를 기꺼이 지불한다.
‘영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1895년 영화가 탄생한 후 되풀이됐다. 최근에는 마틴 스코세이지가 마블 영화와 비교하며 ‘시네마’가 무엇인지 자문자답했다. 1994년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펄프 픽션>이 한국에 개봉했을 때, 비디오 세대의 영화라면서 불편함을 토로한 평론가도 있었다. 일종의 제의(祭儀)처럼, 극장에서 많은 관객이 객석에 앉아 거대한 스크린을 응시하며 동일한 감정과 느낌에 빠져드는 영화와 <펄프 픽션>은 다르다는 주장이었다. 집에서 비디오로 영화를 보며 잠시 멈추었다가, 뒤로 돌렸다가 다시 보기도 하고, 건너뛰어 볼 수도 있는 비디오 세대의 영화적 체험을 비판 혹은 비난한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영화를 유튜브 요약본으로 보는 시대다. 1.5배속, 2배속으로 보는 경우도 많다. 영화의 모든 것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정보와 장면만을 선택하여 흡수한다. 막말로 하자면 영화의 본질이나 내면엔 관심 없는 것이다. 다이제스트로 모든 것을 알려 하는 태도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지금 시대정신은 스킵과 요약이 아닐까. 여행을 가서도, 전시회에 가서도, 핫스폿에서 멋진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된 시대. 그런 점에서 ‘극장’은 일종의 셸터로서 유용하지 않을까. 속도와 효율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소수의 사람이 하나의 경험을 동일하게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서 극장의 힘은 여전히 강하다.
김봉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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