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106) 덕수궁 석조전

기자 2024. 1. 18.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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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현대사의 증인…의연하고 낯설지 않은 것은 왜일까
덕수궁 석조전 1971년. 셀수스 협동조합 제공
덕수궁 석조전 2022년. 셀수스 협동조합 제공

수도권 전철 서울시청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덕수궁이 있다. 원래 남이의 역모사건 가담자인 조영달의 집이 있었는데, ‘역적’의 집이라 조정이 몰수하여 연경궁이라고 이름을 짓고 별궁으로 삼았다. 그 이후 이곳은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이 된다. 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모두 불태웠기 때문에 환도한 선조는 살 곳이 없어 연경궁을 개·보수해 살게 되었고, 정릉이 원래 여기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정릉동행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광해군이 확장을 명하고 경운궁이란 이름을 하사해 정식 궁궐로 승격되었지만,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격하해 오랫동안 버림받았다. 경운궁이 우리 역사의 현장으로 재등장한 것은 1896년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던(‘아관파천’) 고종이 이듬해 이곳으로 환궁했기 때문이다. 근처에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공사관 등이 밀집해 일본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이 선포되었다.

경운궁은 ‘제국’의 ‘황궁’이 되었다. 제국의 위세를 떨치려는 의도에서 확장과 중건을 거듭했지만,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고종이 강제 퇴위되면서 경운궁은 황궁의 지위를 잃었고 덕수궁으로 개칭되었다. 사진 속의 덕수궁 석조전이 지어진 것이 바로 이 시기다. 대한제국 광무 원년(1897년)에 설계가 시작되었고 1910년 8월 경술국치 3개월여 뒤 완공되었다. 그리스·로마 예술의 부활을 꾀한 18~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근대화 시도를 상징한다.

1933년 일제가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석조전은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이 되었다. 해방 이후 12월에는 임시정부 대환영 기념 잔치가 석조전에서 열렸고 이듬해 3월 그 유명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하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1955년 국립박물관, 1973년 국립현대미술관, 1987년 궁중유물전시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 등으로 변모했고, 결국 황궁으로 복원되어 2014년부터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목격자인 덕수궁 석조전은 세월의 흐름에도 그 모습이 의연하다. 덕수궁 석조전 앞에 서면 낯설지 않다고 느껴질 것이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과 비슷하지 않은가?

덕수궁 입장료만 내면 석조전 입장이 가능하니 오늘 신고전주의 황궁 체험은 어떨까? 1, 2층 전시실을 보려면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예약하시길.

김찬휘 녹색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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