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미술관 새 선장 "한국미술 기초체력 키우겠다"
소송·갑질 등 논란 때 관장 취임
'도시락 회의'하며 조직 쇄신 나서
인프라 강화 위해 입장료 인상 검토
저소득층 요금 감면도 함께 연구
미국 이어 유럽서 순회展 개최
기초체력 없인 반짝인기 그쳐
'소장품 확대·세계화' 이룰 것
한국 미술 역사상 지난 한 해만큼 국립현대미술관(국현)의 역할이 중요했던 시기는 없었다. 국민들의 미술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해외 주요 미술관에서 한국 작가들의 전시가 연달아 열리기 시작한 이때, 도약의 중심엔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국가대표 미술관’ 국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술계에서는 이런 말도 자주 나왔다. 지난 한 해만큼 국현이 시끄러운 적도 없었다고. 오랜 기간 조직에 누적된 갈등이 ‘갑질 논란’ 등으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취임한 김성희 신임 관장(66·사진)은 이런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시기를 맞은 국현의 방향타를 잡았다. 그는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출신으로 민간에서 풍부한 기획 경력을 쌓은 인물. 미술계는 외부 출신인 김 관장이 어떻게 국현을 운영할지 관심과 기대, 걱정이 뒤섞인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들리는 얘기는 많지 않았다. 그가 취임 이후 석 달여간 모든 언론 인터뷰를 거절하고 업무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김 관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난 15일 국현 관장실에서 김 관장을 만나 취임 이후 한 일과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조직 분위기 쇄신…미술관의 꽃 ‘전시’로 말하겠다”
‘암투가 난무하는 구중궁궐’. 국현에 대한 미술계 안팎의 인식이다. 2년 전 불거진 내부 갑질 논란과 지난해 학예실장직을 둘러싼 소송은 이런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말 그런가요.” 김 관장은 웃으며 답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잡음이 많았던 건 사실이에요.”
그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1965년 국현 개관 이후 수십년간 정부의 문화 관련 지원은 미술관보다 박물관에 집중됐다. 국가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 최근 10년간 근현대 미술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국현의 업무와 영향력, 조직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도 높아졌다. 하지만 시스템과 분위기는 예전 그대로였다. 이는 갈등의 씨앗이 됐다.
국현의 급성장한 규모와 위상에 맞춰 조직 분위기를 쇄신하겠다는 게 김 관장의 계획이다. 키워드는 소통 강화와 성과 보상이다.
“비록 조직은 경직돼 있지만, 직원들 각자의 수준은 아주 뛰어납니다. 이들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당장의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 면담은 물론 ‘도시락 회의’ 등을 기획해 최대한 직원들과 소통 기회를 늘렸어요. 지난해 12월 인사를 단행한 것도 이런 소통의 결과입니다. 장기적으로는 잘하는 직원에게 승진 기회를 줘서 성과에 대한 보상을 확실히 해주고 싶어요. 승진 정원을 늘리는 건 문화체육관광부와 상의해야 해서 쉽지는 않겠지만요.”
‘좋은 전시’를 통해 이런 노력의 결과를 보이겠다고 김 관장은 말했다. 그는 “국현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다녀간 사람들로부터 ‘이 전시에 시간 내길 잘했네’ ‘잠깐이나마 내 마음을 울렸네’와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경계 없이 모두 즐길 수 있는 전시를 마련하고 이에 맞는 교육 서비스를 운영하는 게 그의 목표다. 그 대표적인 전시가 올해 10월 이강소 회고전이다. 그는 “내년 이후 해외 거장들의 전시도 추진 중”이라고 귀띔했다.
“한국 미술 도약, 지금이 골든타임”
김 관장은 “한국 미술 ‘기초 체력’을 키우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과제가 분관 건립을 통한 지방 미술 인프라 확충이다. 건립을 추진 중인 국립현대미술관 대전관과 관련해 그는 “문화재 변경 허가만 남은 상황이고, 이른 시일 내에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추진 초기 단계인 진주관에 대해서는 “건립 타당성 예비조사를 위한 연구용역비를 확보해 놨고, 문체부와 적극 협의해 속도를 내겠다”고 했다. 전국 각 지역에 있는 도립·시립·사립미술관과의 적극적인 협업 방안도 마련한다고.
국현 입장료를 현행 2000원에서 5000원 정도로 올리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도 미술계 인프라를 더 강화하기 위해서다. “최근 문체부에는 ‘국공립미술관 전시 입장료를 현실화해 달라’는 사립미술관들의 민원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국공립미술관이 너무 요금을 싸게 받다 보니 사립미술관은 티켓값을 제대로 받을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적자 운영을 하거나 문을 닫는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국립중앙박물관과 함께 입장료를 소폭 인상하고, 대신 장애인이나 저소득층 등의 요금 감면·면제 비율을 높이는 방안을 연구 중입니다.”
지금 국현이 직면한 가장 큰 과제로는 ‘한국 미술의 세계화’와 ‘소장품 확대’ 등을 꼽았다. 한 미술관의 정체성은 곧 소장품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해 보다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소장품을 매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 유수의 미술관에서 한국 미술 전시가 열리는 건 물론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앞으로는 미국 전시 후 유럽에서도 순회전이 열릴 수 있도록 해야지요. 다행히 지금 여건은 좋습니다. 전 세계가 한국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경제 대국인 데다 문화 콘텐츠도 훌륭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입니다. 이럴 때 정부와 기업의 지원, 미술계의 노력이 합쳐지면 한국 미술의 위상이 급성장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추진 중인 ‘MMCA 리서치 펠로십’도 세계 미술사에 한국 미술을 온전히 남기기 위한 맥락입니다. 기초체력 없이는 ‘반짝인기’에 그칠 테니까요.”
성수영/김보라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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