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허리가 꼿꼿하니

2024. 1.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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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정기검진일마다 나는 꽤 예민해졌다.

데스크로 가 따져 물을 심산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엄마가 얼른 나를 잡았다.

"심장 판막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피가 새어나가고 있어요. 어려운 수술은 아닙니다. 몸 상태가 좋으시니 많이 힘들진 않을 거예요." 의사는 엄마에게 연신 고개를 끄덕여 가며 설명했다.

우리는 수술 날짜가 잡힐 때까지 뭘 조심해야 하는지, 수술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엄마에게 어떤 징후가 나타나면 응급실로 달려가야 하는지 묻고 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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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정기검진일마다 나는 꽤 예민해졌다. 엄마의 수술 후 경과도 좋고 일 년 주기로 이루어지는 검진인 데다 매번 괜찮은 결과지를 받는데도 그랬다. 마음 한편에 눅진하게 들러붙은 불안 때문이었다. 그날도 나는 샐쭉한 얼굴로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진료 예약이 오전 11시였는데 정오가 다 되도록 엄마는 진료를 받지 못했다. 전광판 아래쪽에 '진료시간 20분 지연' 알림 문구가 떴다. 눈을 돌릴 때마다 숫자는 조금씩 늘어나 30분, 40분 지연으로 바뀌었다.

이럴 거면 예약을 왜 받는담. 데스크로 가 따져 물을 심산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엄마가 얼른 나를 잡았다. 가만둬. 엄마는 진료실 문을, 그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듯 아득해진 눈으로 살피더니 내게 말했다. "가만둬라, 가만둬. 병원에서 오래 진료받을 일이 뭐가 있겠니." 엄마가 작은 한숨처럼 말을 흘렸다. "아주 많이 안 좋은 거지, 그게 어디든."

몇 년 전 엄마와 함께 진료실에 앉아 있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심장 판막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피가 새어나가고 있어요. 어려운 수술은 아닙니다. 몸 상태가 좋으시니 많이 힘들진 않을 거예요." 의사는 엄마에게 연신 고개를 끄덕여 가며 설명했다. 우리는 수술 날짜가 잡힐 때까지 뭘 조심해야 하는지, 수술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엄마에게 어떤 징후가 나타나면 응급실로 달려가야 하는지 묻고 또 물었다. 진료실에서 나올 때 문 앞에 앉거나 서 있던 대기자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와르르 몰렸음에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마 우리 뒤로도 진료 시간 43분 지연 같은 것이 전광판에 찍혔을 것이다.

진료실 문이 열렸다. 처음 나온 사람은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중년 여성이었다. 여성은 빠른 걸음으로 쑥쑥 나아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뒤로 몸을 꼭 붙인 두 사람이 나왔다. 어깨를 옹송그린 작은 체구의 노인과 그를 부축하고 있는 젊은 여성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그들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젊은 여성의 퉁퉁 부은 눈이, 아직도 눈물이 질금질금 배어나오는 눈이 모든 걸 설명하는 듯했다. 여성은 대기 의자에 노인을 앉힌 뒤 나란히 앉아 몸을 수그렸다. 이마가 무릎에 닿도록 상체를 깊이 숙여 노인만큼 작고 동그래졌다.

잘됐음 좋겠다. 나는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수술이든 치료든 다 잘되셨으면. 복도 가득 늘어서 있던 대기자들도 비슷한 마음인 듯했다. 그러니 앞서 나간 중년 여성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을 때 서둘러 주변을 비워주고 아래로 툭 떨어진 노인의 모자를 주워 잘 털어 건네고 발을 밟혀도 불평하지 않고 간호사에게 아무것도 따지지 않은 채 다들 조용조용 그들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후의 진료는 빠르게 진행됐다. 엄마는 지연 시간 알림 숫자가 조금씩 줄어드는 걸 바라보다 문득 내게 말했다. "그래도 허리가 꼿꼿하시더라." "응?" "노인분이라 다리가 약해서 그렇지, 앉아 있는데 허리가 아주 꼿꼿하시더라고. 그럼 괜찮지." 엄마는 의사가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여 가며 말했다. "그럼 다 괜찮지, 괜찮고 말고."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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