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계 꿈꾸는 딸들을 위한 반가운 소식
이승미│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반도체물리학 박사)
새해가 되자마자 졸업식들이 이어진다. 내 기억 속에서는 2월 하순이었던 졸업식은 대체 언제 1월 초로 바뀐 걸까. 언제가 됐건 마침표 뒤에 새 문장이 시작하듯, 졸업식으로 수년의 학업을 마무리한 졸업생들에게는 새해가 더욱 뜻깊게 다가오리라.
1월 첫주에 둘째인 큰딸이 중학교를 졸업했다. 내 눈에는 고작 50㎝ 남짓했던 신생아 때 모습이 아련하건만 이미 몇년 전 내 키를 넘어선 딸은 어느덧 고등학교와 장래 직업을 스스로 결정할 만큼 자라버렸다. 어렸을 때는 하루에 수십번씩 바뀌던 꿈도 이제는 어느 정도 추려졌다. 말끔한 수치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건 사이 인과관계 헤아리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니 이공계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만, 최종 선택은 본인 몫이다.
이달에 졸업하는 자녀를 둔 직장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모두 비슷한 마음이다. 뒤를 잇기라도 하듯 부모와 같은 전공을 선택하겠다는 자녀에게 ‘그래도 내가 헛살지는 않았나 보다’ 싶어 반갑다가도 ‘그런데 대를 이어 이 고생을 하는 게 과연 자식에게 좋은 걸까’ 하는 양면적 감정이 든단다. 자신의 삶을 떠올리며 짐작해보면, 과학기술계는 대학 1학년부터 무겁디무거운 교과서 때문에 가방은 늘 묵직하고 각종 연습문제 풀이와 보고서로 주말에도 시달리며, 행여 대학원까지 진학한다면 바깥세상 구경을 거의 못한 채 꽃다운 20대를 고스란히 실험실에 바칠 테니, 부모로서 양면적 감정이 들 만도 하다.
여기에 더해 딸이 소수자로서 불편을 겪을까 염려하는 동료도 있었다. 2020년 발표된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의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과학자 10명 중 여성은 2명뿐이다. 내 경우도 물리학 전공자 중에는 여성이 더욱 적다 보니 학생 때는 본보기 삼을 여성 교수님이 드물어 아쉬웠고, 의도치 않은 대표성 때문에 불편하기도 했다. 또 “우리 연구그룹 역사상 아시안 여성은 당신이 처음입니다”가 환영(?) 인사였던 이후로, 나의 모든 행동이 마치 눈밭에 처음 찍힌 발자국처럼 아시안 여성과학기술인의 표본으로 각인될까 봐 근무 내내 조심스러웠으니 말이다.
과학기술계로 진학하는 딸을 걱정하는 부모에게 한가지 반가운 소식이 있다. 지난 9일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260명 중 257명이 찬성해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여성과기인법) 개정안이 가결되었다. 여성과기인법은 여성도 과학기술인으로서 자질과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2002년 제정되었다. 그 뒤 20년 넘게 흐르는 동안 디지털 대변환, 일·생활 균형 문화 확산, 과학기술인력 수급 저하 등 대내외적 환경 변화에 맞추기 위해 개정이 추진됐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지난 10년간 지속해서 낮아져 급기야 2022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저이자 평균값(1.59)의 절반 이하인 0.78명까지 떨어졌다. 천연자원이 없다시피 한 대한민국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하지만 2023년 기준 경력단절 여성과학기술인은 무려 19만명에 달한다. 여성과기인이 출산 뒤 과학기술계로 복귀하지 못할수록 국가적 손실이 커질 뿐이다. 이번 여성과기인법 개정은 임신·출산·육아와 가족 돌봄 등을 이유로 여성과기인이 연구 활동을 중단하지 않도록 지원 체계를 구축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올해 과학기술계로 진학하는 학생은 과연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며 과학기술인으로 성장할까? 물론 미래는 알 수 없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남과 동시에 세상이라는 무대에 세워지고, 연습도 맛보기도 없이 오직 실전뿐인 단 한번의 공연이 바로 인생이니까. 하지만 인생이라는 연극의 대본을 먼저 읽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법이나 사회문화 등의 무대장치가 도움이 된다면 같은 무대에 선 공연자 모두가 더 멋진 공연을 펼칠 수 있으리라. 더욱 포용적인 과학 강국 대한민국을 위하여.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남북 대결 ‘코리아 디스카운트’에…‘부자감세’ 증시 띄우기 안간힘
- 두 개의 조선, 불변의 주적…‘김정은 선언’을 읽는 5개의 물음표
- 서울 양천·구로 일대 3만여 세대 온수·난방 끊겨
- 추격당한 삼성전자…스마트폰 이어 반도체도 ‘글로벌 1위’ 뺏겼다
- 팬데믹은 국가를 가리지 않는다, 외계인 침공처럼
- ‘정권심판’ 돌아온 이재명, 핵심 과제는 ‘공천 관리’
- 눈비 속 영정 닦으며 용산까지…“이태원 특별법 신속히 공포해주길”
- 오늘 ‘최고 13도’ 포근한 날씨…전국에 비 또는 눈
- “엄마 차 7개월 몰래 몰다가…” 400만 마음 흔든 ‘유쾌한 애도’
- [인터뷰] ‘신림동 강간살인’ 피해자 오빠의 호소…“CCTV론 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