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대에 오르는 기분”…명 연주자도 예외 없는 무대 공포증
치아 딱딱 부딪혀 수건으로 입 틀어막아
“무대로 나가는 게 마치 사형대 위로 오르는 것만 같았다.” 런던필하모닉 바이올린 주자 톰 아이스너의 ‘가디언’ 기고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던 첫 무대에 대한 기억이다. 그는 “20년 넘게 연주했는데도 무능한 초보자가 된 기분이었고, 공황상태에 빠져 탈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떠올렸다.
무대 공포증은 프로, 아마추어 연주자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영혼을 잠식한다. 객석을 메운 청중, 눈부신 조명 아래 홀로 들어선 무대 위 연주자는 극한의 긴장에 빠져든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명성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심한 경우엔 약물 처방을 받지만 저마다 나름의 방법으로 무대 공포증을 이겨내기도 한다.
올해 금호아트홀 상주연주자로 위촉된 피아니스트 김준형(26)은 지난 8일 간담회에서 우주와 관련된 유튜브 영상을 자신만의 무대 울렁증 극복 비법으로 소개했다. 그는 “광활한 우주에 비해 한없이 작은 이 무대에서 뭘 이렇게 긴장하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거짓말처럼 울렁증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피아니스트 임동혁(40)은 “무대 공포증이 심한 편”이라며 “무대에 한 번 설 때마다 수명이 50일씩은 줄어드는 것 같다”고 했다. 영국의 저명한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63)는 “온몸이 마비되고 뱃속이 울렁거리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심장이 요동친다”고 자신의 무대 불안 증세를 묘사했다. 그는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라는 질문이 불안의 핵심”이라고 짚었다.
최고의 스타 피아니스트들도 이를 피해가지 못한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9)는 증세가 심해 4차례나 은퇴를 반복했다. 연주회 전날이면 심한 위경련을 겪었고, 매니저가 등을 떠밀어야 가까스로 피아노 앞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속삭이곤 했다. “나는 오늘 연주할 곡을 잘 알아, 안다고.” 글렌 굴드(1932~1982)는 누구보다 무대에 두려움을 느꼈다. 청중이 매섭게 노려보는 무대 연주보다 텅 빈 스튜디오 녹음을 누구보다 선호했다. 그가 남긴 숱한 명반은 어쩌면 무대 공포증이 건넨 선물일지도 모른다. 마르타 아르헤리치(83)는 공연 직전에 연주를 자주 취소해 악명을 날렸는데, 무대 공포증이 원인이었다. 무대에 오르는 순간이 다가오면 “콧물이 흐르고 손가락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면서 치아가 캐스터네츠처럼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칠 정도”였다.
피아니스트뿐만이 아니다. 일세를 풍미한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1876~1973)도 “무대는 악몽”이라며 “수천번을 연주해도 공포감은 처음 연주할 때처럼 그대로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65)은 1990년대 후반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에서 청중의 심한 야유를 받은 이후 무대에 오를 때마다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플레밍은 “죽고 싶은 생각이 들고 온몸의 세포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고 떠올렸다.
피아니스트 정승미(43)는 저서 ‘무대 공포증 극복 시크릿(예솔)’에서 무대 공포증의 원인으로 △과거의 실패 경험 △완벽주의 성향 △경험 부족 △연습 부족 △열등감을 꼽았다. 정승미는 “거북이처럼 등이 굽거나 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는 학생도 있다”며 “입시생 중엔 치아가 부딪히는 걸 막기 위해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연주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그가 제시하는 무대 공포증 극복 방법 5가지는 철저한 연습, 긍정적인 자기 확신, 구체적인 무대를 가정한 이미지 트레이닝, 자신만의 연주 루틴 만들기, 최고의 컨디션 조절 등이다.
연주자들도 무대 공포증 해소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쓴다. 스티븐 허프는 “관객 모두가 발가벗고 있다고 상상하는 방법으로 무대 불안을 극복한다”는 어느 피아니스트의 고백을 전했다. 독일 소프라노 군둘라 야노비츠(87)는 공연 전과 공연 도중 짬짬이 와인을 마시는 걸로 유명하다. 베를린 필하모닉 호른 주자는 무대로 오르기 전에 꼭 맥주를 마셔야 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무대로 나가기 직전에 반드시 바나나 1개를 먹는다는 피아니스트도 있다. 미국 피아니스트 에마누엘 액스(75)는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가 무대에 오르곤 한다. 피아니스트 백건우(78)는 무대에 오르기 전 1분 남짓 부동자세를 취하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피아니스트 백혜선(59)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잠을 자며 긴장을 푼다. 전설적 바이올리니스트 에후디 메뉴인(1916~1999)은 연주 시작 15분 전쯤 따뜻한 우유 한 잔으로 몸을 풀었다.
음대 입시생 등 일부 연주자들은 공연 전 긴장 완화를 위해 심장 질환 치료에 사용하는 약물을 처방받기도 한다. 혈압을 낮추거나 공황장애 증세에 처방하는 한 약품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쿠르트 징어 음악 건강 연구소’ 헬무트 몰러 소장은 “클래식 연주자의 25∼30%가 무대 공포증 극복을 위해 약물이나 알코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추정했다. 입시생의 일회적 약물 처방은 대체로 용인하는 분위기지만 프로 연주자의 약물 복용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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