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당한 집’에 살아도 혹한에 이건 아니잖아요

김경민 기자 2024. 1. 18.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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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주택 가보니
침수된 복도 전세사기 피해자 허민우씨가 지난 15일 자신의 집에서 침수된 복도를 내려다보고 있다. 문재원 기자
단전·누수 등 관리 부실로
피해자들 열악한 환경 노출
임대인 잠적, 관리자는 없고
정부는 “지원 대상 아니다”
전문가들 “지자체가 개입을”

지난 15일 오후 8시쯤 인천 계양구의 낡은 연립주택. 복도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자 퀴퀴한 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전세사기 피해자인 허민우씨(25)가 연두색 현관문을 열자 복도에 손가락 마디만큼 차오른 물이 밀려 작게 물살이 일었다. 허씨는 “어제 저녁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물을 뺐는데도 이 정도”라며 멋쩍게 웃었다.

허씨는 지난해 2월 집주인으로부터 ‘파산하겠다’는 문자를 받았다. 주택 수백채의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집주인 이모씨와 일당은 사기죄로 검찰에 불구속 기소됐다. 그 이후 집주인과는 연락이 끊겼다.

지난해 8월 허씨는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됐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허씨는 전역 후 모은 목돈과 대출로 마련한 전세금 8000만원을 여전히 변제받지 못했다. 그는 집을 스스로 낙찰받을 수 있는 선순위 임차인이며 아직 자택의 경매를 진행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긴급주거지원 등 정책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지자체의 지원도 받지 못했다. 허씨에게 결국 남겨진 선택은 이 집에서 그냥 사는 것이었다. 살아야 하는데 이 집은 살 수 있는 집이 아니었다. 입주 후 생긴 누수는 지금도 매일같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허씨는 금전적인 문제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는 “경매로 낙찰받고 수리를 해야 되는데 수리비가 얼마나 들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허씨는 “콘크리트가 물을 오래 머금고 있다는 것은 위험한 것”이라며 “지금은 철근이 버텨주고 있지만 지반이 약해지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고 말했다.

관리가 안 돼 망가진 집을 두고 도망치듯 거처를 옮기는 피해자도 있다. 주택 수천개의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화성 ‘빌라의 신’ 권모씨 일당의 피해자 손모씨(34)의 집은 2022년 여름 천장에서 윗집 하수가 쏟아졌다. 신혼부부인 그는 경기 화성시 병점동에 위치한 신축빌라에 1억5000만원 전세로 입주했는데, 권씨가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침수 관리는 오롯이 손씨의 몫이 됐다.

지난 16일 찾은 손씨 집에 들어가자마자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씨는 “심할 땐 여름에 화장실에 가면 나는 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천장의 벽지를 뜯자 누렇게 변색된 석고보드 위로 곰팡이가 거뭇하게 피어 있었다. 반년 넘게 이곳에서 거주한 그는 그해 12월 어머니가 구해준 근처 전셋집으로 도망치듯 거처를 옮긴 상태다. 손씨는 “악취가 심하고 도저히 못 살겠어서 대항력만 유지하기 위해 가구 몇개만 두고 나왔다”고 말했다.

허씨와 마찬가지로 선순위 임차인인 손씨도 정부의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지자체의 지원도 없었다. 손씨는 “(전세사기) 피해를 복구하려면 집을 수리해서 경매로 팔아야 되는데 수리 비용도 2000만원이라 건들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며 “금전적 문제로 자녀계획도 포기했다”고 밝혔다.

임대인이 잠적하거나 구속돼 주택의 관리자가 부재한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허씨와 손씨처럼 누수·단전·단수 등 관리 부실로 열악한 주거 환경에 노출되고 있다.

코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에 도피…“금전적 문제로 자녀계획도 포기했죠”

경기 화성시 병점동 전세사기 피해자 집 천장 벽지 너머로 곰팡이가 보이고 있다(왼쪽 사진). 인천 계양구 반지하 주택에 사는 전세사기 피해자 집의 벽에도 곰팡이가 피어 있다.

지난해 11월20일부터 24일까지 서울 강서구청이 전세사기 피해자 355명을 대상으로 전수 실태조사를 한 결과 피해자의 상당수인 225명(70.3%)이 임대인 부재로 건물 유지·보수 문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관리 부실의 피해를 호소하고 있지만, 정부는 피해주택의 관리 문제까지 도울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임시 거처 제공 대상에 부합하지 않거나 경매를 기다리는 피해자들은 지자체와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해 부실한 집에서 거주해야 하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관리 부실 주택에 대한 지자체의 구제 노력이 부족하다며 지자체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수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은 “지자체가 지원할 의지가 없는 상황에서 하자 문제를 피해자들이 홀로 감당해야 한다”며 “기본적인 집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시설관리에 대한 지원이 마땅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재만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지자체가 관리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살려서 개입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야당은 지난달 27일 전세사기 피해를 입은 공동주택에 대해 지자체가 관리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을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국민의힘의 반대로 개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전세사기 피해자 단체는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 후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방치된 주택의 관리 문제 개입 등을 촉구하기도 했다.

김경민 기자 kim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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