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조선, 불변의 주적…‘김정은 선언’ 읽는 5개의 물음표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의 “북남관계는 적대적 두 국가 관계”이며 “대한민국은 불변의 주적”이라는 선언은 파괴적이다. 김 총비서의 ‘신노선’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일 노선과 어떻게 같고 다른가? 무슨 뜻인가? 왜 지금인가? 목적이 뭘까? 누구한테 이로운 선택인가?
단절과 지속…남북관계 ‘이중궤도’에서 ‘단일궤도’ 전략으로
김 총비서의 ‘신노선’은 김일성·김정일의 남북관계 인식에 비춰 ‘단절’과 ‘지속’의 두 얼굴을 함께 갖고 있다.
북쪽은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이래 “조선은 하나다”라는 모토 아래 ‘조국통일’을 국가 목표로 내세웠다. 하지만 김 총비서는 지난 15일 최고인민회의 14기 10차 회의 시정연설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헌법에서)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밝혔다. 김일성·김정일의 통일 노선과 단절 선언으로 들린다. 하지만 한꺼풀 벗기면 김일성·김정일식 통일정책의 형식을 폐기했을 뿐 ‘사회주의 조선’의 보존과 흡수통일 차단이라는 목표는 달라지지 않았다.
북한은 1991년 9월17일 유엔 분리·동시 가입으로 남과 북이 국제법적으로 별개의 주권국가임을 확인하곤, 같은 해 12월13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 지향 특수관계”라며 ‘국가관계’를 부인했다. 북쪽이 두려워한 흡수통일을 회피하려는 ‘두개 한국·조선’(Two Koreas)의 공존 모색이다.
김 총비서는 최고인민회의에서 “조선반도에 병존하는 두개 국가를 인정”한다고 했는데, 이는 겉으론 ‘하나의 조선’을, 속으론 ‘두개 조선’을 지향해온 김일성·김정일식의 ‘이중궤도’ 전략을 버리고 단일궤도 전략으로 갈아타겠다는 뜻이다. 남북기본합의서 체제의 폐기이자 유엔 가입 체제, 곧 ‘두개 조선’ 인정의 전면화다. 북한 출신의 원로 연구자는 “앞으로 한국을 (적대국인) 일본 대하듯 하겠다는 뜻”이라고 짚었다.
모든 남북 합의 무효화?
김일성·김정일 집권기의 ‘하나의 조선’ 원칙은 통치 이데올로기일 뿐 대외전략의 대원칙이 아니었다. 중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앞세워 대만과 수교한 나라와 예외 없이 단교한 것과 달리, 북한은 159개 수교국 가운데 156개국이 남쪽과 동시 수교국이다. ‘두개 조선’ 인정은 오래된 현실이다. 북쪽은 남북 당국 간 첫 문서 합의인 7·4 공동성명을 맺은 이듬해인 1973년엔 남쪽은 이미 가입한 세계보건기구(WHO)·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국제의회연맹(IPU)에 가입하며 ‘두개 조선’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김 총비서도 2012년 집권 이후 남과 북의 시간을 분리하는 ‘평양시간’ 제정(2015년 8월15일) 등을 통해 남북관계를 ‘두 국가 관계’로 재설정하고 싶다는 지향을 드러내왔다. 김 총비서가 52년 전 할아버지 김일성이 7·4 공동성명으로 천명한 ‘조국통일 3대 원칙’(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헌법에서 삭제하라고 지시한 것은 기존의 모든 남북 합의를 무효화하겠다는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북을 ‘주적’이라 비난하는 윤석열 정부 때가 적기?
그렇다면, 왜 지금 ‘신노선’인가? 김일성·김정일의 “조선은 하나다”라는 민족주의의 깃발을 땅에 묻겠다는 김 총비서의 선언은 통치이데올로기와 국가정체성의 전면적 재구성을 겨냥한 것으로, 정치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김 총비서가 “(남쪽은) 철저한 타국, 가장 적대적인 국가”라고 인민을 설득하자면,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나서 북쪽을 “주적”이라고 비난해온 현 정부 시기가 맞춤하다고 여겼을 수 있다. 올해 헌법 개정에 이어 2026년 노동당 9차 대회에서 당규약을 고쳐 북한의 법규범 체계에서 ‘통일’을 완전히 지우고 나면, 2027년 출범할 남쪽의 새 정부와 ‘국가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는 구상으로 볼 수 있다. 세차례나 직접 만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1월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정세 전망도 김 총비서의 ‘신노선’ 선언 시기 선택에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분석도 있다.
목표는 ‘정상국가’의 절대권력자?
김 총비서 ‘신노선’의 목적은 뭘까? “사회주의 시조”인 할아버지 김일성, “세계 사회주의 체계의 붕괴 속에 사회주의 전취물을 수호”한 아버지 김정일에 이어, “주체조선의 자주권·생존권·발전권”을 꽃피울 ‘3대 수령’으로서 차별화된 리더십 구축이 궁극의 지향일 것으로 보인다. 김 총비서는 핵억지력으로 안보 방파제를 쌓고 자립경제 건설에 힘을 쓰면 “우리식 사회주의의 전면적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은 듯하다. 한 북한 연구자는 “김정은의 꿈은 정상국가의 절대권력자”라고 말했다.
민족주의·통일 노선 폐기의 역설?
하지만 절대다수의 전문가들은 북한 경제의 지속가능한 발전은 대외관계의 획기적 개선을 통한 외부 자원·기술의 유입 없이 가능하지 않다고 진단한다. 김 총비서의 ‘대남 쇄국정책’이 전략적 실수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선은 하나다”를 모토로 통일·민족주의 논의에서 북쪽이 쌓아온 자원을 스스로 내다 버리겠다는 선언이어서다. 옛 동독 출신으로 김일성종합대에서 공부한 뤼디거 프랑크 빈대학 교수는 한반도 전문 웹진 ‘38노스’에 쓴 글에서 김 총비서의 새 정책을 “한국에 주는 선물”(a gift to South Korea)에 비유하며 “역설적이게도 이 새 정책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쪽(winner)은 한국, 특히 한국의 보수세력이 될 듯하다”고 짚었다. 북쪽의 통일정책 폐기로 앞으로 한국이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주장하는 ‘유일한 주체’가 될 터이고, 북쪽의 군사행동을 동반한 대남 강경정책이 남쪽 보수세력의 입지를 오히려 높여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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