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칼럼] “남조선이 대한민국이라고?”

양상훈 주필 2024. 1. 18.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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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 혈통 위협하는 한라 혈통
탈북민과 북 가족이 대한민국 선망 일으킬까
김정은 입에서 나온 ‘대한민국 것들과 전쟁’

김정은이 ‘남조선’ 대신 ‘대한민국 것들’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한민국’은 금기어였다. 그들 나름의 외교 전략이 있겠지만 이 급작스러운 정책 변경은 북한 사회의 참담한 실상이라는 내부적 요인도 한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김정은이 같은 회의에서 “평양과 지방 격차 해소”라는 이례적 지시를 한 것도 그런 내부적 요인을 짐작하게 한다.

일론 머스크가 엑스(트위터)에 올린 한반도 야간 위성 사진. /엑스

탈북민들 얘기를 들어보면 평양과 지방은 다른 나라다. 평양 특권층은 프랑스 명품을 입고 샤부샤부를 먹는다. 평양 일반 주민도 한국 1980년대 생활은 하는 것 같다. 그런데 평양 밖 2000만명은 한국 1960~1970년대만도 못한 삶을 산다. 북한 엘리트 출신 탈북민은 고난의 행군(1990년대) 때 북한군 고위 장성으로부터 “인민 12%가 굶어 죽었고 당원들도 죽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 인구가 2500만명이라면 300만명이 아사한 것이다. 필자는 한때 이 숫자를 믿을 수 없었지만 많은 탈북민들 얘기를 들어 본 지금은 믿게 됐다.

이 시기 이후 평양 밖 북한은 지옥이 됐다. 지금 북한 기업소의 평균 월급은 북한돈 2000원 정도인데 실효 환율이 1달러에 3000원이다. 2000원으로 달걀 2개를 살 수 있다. 이 월급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탈북민이 대다수다. 식량 배급이 끊긴 지는 오래다. 주민들은 “양은 다 죽었고 여우(눈치 빠른 일반 백성)와 승냥이(당 간부)만 남았다”고 한다. 여우들은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 먹을 수 없는 것까지 먹는다. 상한 음식은 당연히 먹는데, 치약을 조금 같이 먹으면 괜찮다고 믿는다. 치약 없는 사람은 흙도 같이 먹는다고 한다. 가진 것 팔고, 훔치고, 굶으며 질긴 목숨을 이어간다. 한 탈북민은 “홍수에 돼지와 사람이 떠내려 왔는데 사람들이 돼지를 건졌다”고 했다. 승냥이들은 이 여우들을 탄압해 뜯어먹고 산다. 뇌물이 없으면 되는 일이 없고, 뇌물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 평양 특권층 자식들은 뇌물 주고 군대도 안 간다.

삶과 죽음이 지척 간이다. 영양실조에 위생 상태가 엉망이어서 감기에 걸려 죽기도 한다. 사람과 개 배설물이 널려 있다. 환자가 마취제, 소독약, 붕대, 항생제 등을 장마당에서 사서 병원에 가야 한다. 마취 없는 수술도 횡행한다. 한 탈북민은 “아내 출산 진통이 심해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약과 도구를 사오라고 했다. 밤중이어서 장마당도 없었다. 헤매다 돌아가니 차가운 철 침대에 아내와 핏덩이 아기가 팽개쳐져 있고 의사는 가버렸다. 그때 탈북을 결심했다”고 했다. 북한군 간호사 출신 탈북민은 “한국 와서 내가 내 혈액형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평양 밖 주민 중 혈압을 평생 한 번이라도 측정해 본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북한 여군 중에 생리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다시피 하고 육군은 절반 안팎이 영양실조라고 한다. 한 탈북민은 “아들이 10년 만에 제대하고 왔는데 40㎏이 안 됐다”고 했다.

지방 수도꼭지는 거의 막혀 있고 평양도 제한 급수다. 강 위에선 빨래를 하고 아래에선 그 물을 길어 마신다. 물 노동은 여성 전담이다. 한국서 샤워기 물을 맞으며 울었다는 탈북 여성이 많다. 한국 도착 직후 처음 본 변기 물로 양치질을 한 탈북민도 있다. 그 물에 손 씻은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북에서 마시던 물보다 그 물이 더 깨끗해 보였다.

이 지옥의 유일한 탈출구는 ‘탈북’이다. 한국에 3만여 명이 와 있고, 중국엔 더 많다. 그런데 탈북민들이 중국서 놀라운 얘기를 듣는다. ‘썩고 병든 자본주의 남조선’과 ‘대한민국’이 실은 같은 나라라는 것이었다. 과거 북한 주민 중 ‘대한민국’ 국호를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는 사람도 대한민국은 ‘잘산다는 어떤 나라’였고 ‘거지들이 들끓는 남조선’과 동일시하지 못했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도 그랬다고 한다.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라고 한다. 그만큼 외부 정보 차단과 세뇌가 철저했다. 그런데 이제 ‘남조선=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이 탈북민 가족과 탈북민들 유튜브를 통해 북한에 흘러 들어가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 ‘대한민국’이 입에 오르내린다고 한다. 이는 김씨들 내부 단속에 문제를 던졌을 것으로 보인다. 김씨들은 더 늦기 전에 용도가 떨어진 ‘남조선’을 폐기하고 ‘대한민국’을 전면에 올려 주민들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적개심을 집중 세뇌하기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뇌의 현실화’인 셈이다.

북에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세뇌당한다. 굶어 죽으면서도 이것은 백성 탓이지, 주먹밥 먹고 일 하시는 장군님 탓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살기가 너무 힘드니 백두 혈통 숭배에도 작은 금이 생기고 있다. ‘한라 혈통’(한국 온 탈북민과 북의 가족)이다. 탈북민들이 만든 말이다. 넓게 보면 수십만명일 것이다. 이제 돈이 있는 한라 혈통은 북에서 좋은 결혼 상대라고 한다. 한국 옷과 전자제품은 이미 인기다.

김씨들은 한라 혈통의 확대를 막으려 기를 쓴다. 국경선에 철조망을 치고 가차 없이 총을 쏜다. 김정은이 갑자기 “대한민국 것들” “전쟁” 운운하고 “통일 없다” “같은 민족 아니다”라는 것도 주민들의 ‘대한민국 선망’을 초기 원천 차단하려는 것이다. ‘평양과 지방 격차 완화’라고 주민 회유도 시작했다. 대한민국과 한라 혈통이 백두 혈통의 발버둥을 넘어서길 바랄 뿐이다.

양상훈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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