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섭의 그레이트 게임과 한반도] [19] 3대 이념이 격돌했던 인류 최대의 전쟁… 臨政은 민주주의를 고수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전 가미카제(神風)호가 도쿄-런던 비행에 성공했다. 영국왕 조지 6세의 대관식 축하를 겸해 일본의 항공력을 과시한 것이다. 다음 해 9월 영국, 프랑스는 소련의 팽창을 의식하며 나치 독일과 뮌헨협정을 체결했다. 1939년 8월 소련도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아시아는 중일전쟁 중이었지만 유럽은 계속 평화를 구가하는 듯했다.
불과 한 달 후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으로 평화의 꿈은 깨졌다. 이때의 충격은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신속한 파병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1921년 피우수트스키 장군을 중심으로 러시아 공산군을 무찔렀던 폴란드였지만 독일, 소련의 분할 점령은 막지 못했다. 폴란드군 6만 명 이상이 전사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직면한 이후 폴란드가 K무기들을 대량 구매하고 있는 슬픈 배경이다.
동서(東西) 전쟁이 중첩된 제2차 세계대전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독일은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프랑스 파리까지 점령했다(1940년 6월). 그 사이 소련은 핀란드를 침공, 국제연맹에서 제명되었다. 독일이 손쉽게 파리를 점령하자 일본은 3개월 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격했다. 서양의 동아시아 식민지들을 건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이 북진 대신 남진을 선택한 것은 1939년 9월 할힌골(노몬한)에서 소련·몽골군에 참패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41년 6월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동쪽으로 진격했다(바르바로사 작전). 동맹국 일본이 소련을 협공하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불과 2개월 전 소련과 체결한 중립조약의 파기를 망설였다. 덕분에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한 독일계 소련 간첩 조르게는 일본에서 사형에 처해졌지만 소련에서는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1년 12월 8일을 기점으로 일본은 영국령 코타바루(말레이반도)와 미국령 하와이, 필리핀, 괌 등을 공격했다. 석유 등 전쟁 자원이 풍부했던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도 차지했다. 서양 식민주의자들과 싸우던 동남아 독립운동가들은 누구 편을 들지 난처했다. 일본은 ‘대동아’를 명분으로 이들을 끌어들였다.
독립 투쟁의 중심이었던 대한민국임정
1943년 일본군이 버마(미얀마), 인도로 진격하자 한국광복군 9명이 영국군과 협력했다. 이들은 일본어와 한국어를 구사하며 일본군(조선 출신 포함)을 상대했다. 1940년대 일본군을 직접 상대한 진귀한 참전 기록이다.
1930년대 만주에서 공산주의 항일 투쟁을 하던 김일성 등은 소련에 있었다. 일본과 중립조약을 체결한 소련에서 30세를 넘긴 김일성의 정치적 위상은 빠르게 성장했다. 선배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중국공산당의 민생단 학살과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사라졌거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있었다. 한반도 해방 이후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소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주와 백두산에서 계속 항일 무장투쟁을 했다는 건국신화를 만들어 체제를 유지했다. 소련은 1945년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빠르게 만주, 한반도 이북, 그리고 쿠릴열도를 차지했다.
김일성을 항일 무장투쟁의 상징으로 만든 평양의 건국신화와 달리 사실은 대한민국임정이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립 외교는 물론 무장투쟁의 중심이었다. 1940년 2월 2일 이승만은 김구에게 서한을 보내 “우리나라, 일본, 중국, 러시아 각 나라 항구와 요지에 (중략) 거사 계획을 약속했다가 무르익으면 한꺼번에 일어날 것”을 계획했다. 일본의 “군함·병영·관공서·군수공장 등을 파괴·방화하는 일, 사보타주, 비행기를 포격하고 시위할 것, 군인 수백 수천으로 습격 항전할 것” 등이 계획에 포함되었다. 아직 미국 국민의 90% 이상이 전쟁에 반대하던 때였다.
실제로 1941년 12월 일본의 하와이 공습으로 미일전쟁이 발발하자 이듬해 6월 이승만은 미국의 소리(VOA) 단파 방송에서 연설했다. “... 얼마 아니해서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니 일황 히로히토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이 연설은 경성방송국에 있던 조선인들이 청취해 국내에 확산됐다.
안창호의 자녀들을 포함한 수백 명의 재미 한인들이 미 군복을 입고 일본과 싸웠다. 언더우드, 윌리엄스 등 일제가 추방한 미국 선교사들과 그 자녀들도 참전했다. 김구의 아들 김신은 중화민국 공군군관학교에 이어 미국 랜돌프 비행학교에서 공부했다. 이승만은 평생에 걸쳐서 “나에게도 자식이 있었다면 군대에 보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민주주의를 고수했던 대한민국임정
제2차 세계대전은 국가의 인력과 자원을 오직 승전을 위해 투입하는 총력전(total war)이었다. 이러한 총력전에는 민주주의보다 민족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더 적합해 보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싸우던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주의는 유효한 체제이며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는 국민들이 생각하고 말할 수 있으며 정신을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유연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재국가는 전쟁을 할 때 작전의 마지막 세세한 부분까지 사전에 확정해 놓은 상태에서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초반에는 꽤 좋은 전과를 올릴 수 있지만, 종국적으로는 계획상 차질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중략) 독재국가들은 전쟁을 하나의 과학으로 만들려고 애썼지만, 실제에 있어서 전쟁이란 하나의 예술이다.”
이승만을 매개로 민주주의 미국과 연대했던 김구, 지청천, 이범석 등은 1945년 8월 시안에서 미국 CIA 전신인 OSS 책임자 도노반(William J. Donovan)과 한반도 해방 작전을 협의했다. 비록 이 작전이 실행되기 전에 한반도가 해방되었지만 그 경험은 소중했다. 그것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이어진 지정학적 고민의 산물이기도 했다.
1896년 독립협회 이래로 독립운동은 외세에 맞선 저항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서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다. 수백만 명의 군대들이 충돌했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비록 군사적 기여는 미약했지만 대한민국임정이 선택한 길은 옳았다. 그 길 위에 현재의 대한민국이 서 있다.
3대 이념들이 충돌했던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은 약 5000만명 이상이 죽은 인류 최대의 전쟁이었다. 그 배후에는 더 나은 삶을 약속했던 3대 이념 간의 충돌이 있었다.
첫째, 공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대자본가들에게 돌리며 공동 소유를 통한 평화를 주장했다. 내세의 천국 대신 현세의 천국을 약속했다. 러시아정교 성당들이 갑자기 무신론 학원으로 변했고, 저항하던 사제와 수녀들은 죽임을 당했다. 문화예술인들은 공산주의적 인간을 만들기 위해 복무해야 했다. 1936년 이후 공산주의는 인민민주주의를 내세웠다.
둘째, 민족사회주의는 국제공산주의에 맞서 민족을 내세우면서 자본가들을 통제했다. 특히, 독일의 민족사회주의자들은 대자본가들이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모두 유태인들이라며 제노사이드를 자행했다. 일본의 민족사회주의는 야마토 민족의 상징인 덴노(天皇)와 사회주의를 결합시켰다. 베이징의 천자 중심적 세계관을 천황 중심적 세계관으로 바꾸어 놓고, 천하가 “하나의 집(八紘一宇·팔굉일우)”이라고 선전했다. 대동아의 “황국신민”은 “귀신, 짐승 같은 영·미(英美鬼畜)”와 싸우라고 독려했다.
셋째,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에 입각한 행복을 약속했지만 공산주의나 민족사회주의에 비해 나약해 보였다. 독일 바이마르민주공화국은 허망하게 무너졌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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