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낙엽으로 사는 삶
바닥에 깔린 낙엽으로 사는 삶을 떠올려 본 적 있는가. 지난달 말 개봉한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그런 생각을 하게끔 해준다. 핀란드 헬싱키를 배경으로 두 남녀가 만나는 사랑 이야기의 외피를 썼지만, 본질은 민생(民生) 이야기다. 여자 주인공은 대형 마트에서 일하며 유통기한이 지난 폐기 상품으로 끼니를 때우다 걸려 해고당한다. 곧장 맥줏집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구하지만 사장이 마약을 팔다 경찰에 붙잡히는 바람에 일주일 치 임금도 떼먹힌다. 남자 주인공은 알코올 중독으로 낮에는 공사판, 밤에는 술집을 전전하며 산다.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게 없는 이들의 팍팍한 삶은 시간을 초월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1960년대인지 1980년대인지 2000년대인지, 밑바닥 삶은 언제나 그래 왔다고 말하는 것 같다. 라디오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속보만이 이 이야기가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을 알린다. 주인공들은 전기료 고지서를 받아들고 화들짝 놀라 두꺼비집을 내리고, “이 망할 놈의 전쟁!”이라며 분노한다. 두 주인공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과 이들이 겪는 갖은 수난은 전쟁과 무관하지 않다.
거리에 나뒹구는 낙엽은 외부 요인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바람이 불면 날리고, 밟혀 찢어지거나 비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마련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낙엽도 녹록지 않은 한 해를 보냈다. 러·우 전쟁에 이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고 공급망 불안이 이어지는 등 대외 불안 요인이 한국 경제를 꾸준히 괴롭혔다. 누적된 고물가·고금리에 소비자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자 내수도 얼어붙었다. 수출이 부진한 동안 경기 버팀목 역할을 해왔던 소비가 힘이 떨어지자 체감 경기는 살얼음판이 됐다. 작년 10월부터 수출이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내수에 온기가 돌려면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그래서인지 정부는 새해부터 각종 민생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올 한 해 경제정책의 밑그림을 그리는 ‘경제정책방향’의 첫째 키워드는 ‘민생경제 회복’이었다. ‘설 민생대책’에도 물가 부담을 덜기 위한 각종 할인 지원과 서민·취약계층·소상공인을 위한 여러 감면 혜택이 담겼다. 최상목 부총리는 이를 “민생 회복이라면 뭐든 다 해보겠다는 정책적 의지”라고 했다.
그런데 정부의 민생 챙기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작년 하반기, 물가 상승률이 3%대 후반으로 오르자 관가에 비상이 걸렸더랬다. 물가는 민생, 민생은 곧 표심(票心)으로 이어진다는 용산의 우려에 장·차관, 실장급까지 줄줄이 물가 현장으로 뛰쳐나갔다. 재작년 물가 상승률이 6%대를 찍었을 때보다 더 요란했던 건 총선이 부쩍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게 ‘기승전-총선’인 상황이다. 정부가 말하는 민생 살리기가 진짜 바닥의 삶을 위하는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너무 나이브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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