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3]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을 때
꾸벅 졸면서
나에게로 숨을까
겨울나기여
居眠[いねぶ]りて我[われ]にかくれん冬[ふゆ]ごもり
아아,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 당시 도쿄에서. 일본 친구와 함께 그날 본 조조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다가 심상치 않은 진동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온 세상이 흔들린다. 신주쿠의 빌딩 숲. 도망칠 곳이 없다. 숨을 곳이 없다. 땅이 파도치니 뱃멀미하듯 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의 고층 건물이 앞뒤로 흔들리며 윙윙 소리를 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벽 울림이다. 저 벽이 무너지면 나는 죽겠구나. 그곳이 나의 무덤이겠구나. 거기 있던 사람들처럼 나도 길가에 옹크렸다. 그 순간에는 내 안으로 숨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디로도 도망칠 곳이 없을 땐, 나 자신에게 숨는 것도 방법이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언제든 나에게 든든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내가 되자. 여러 차례 지진 경험이 나를 단련시켰다.
부손(蕪村, 1716~1784)은 한겨울 추위를 피해 잠든 자기 안으로 숨고 싶다고 했다. 자기 안에 숨는다는 표현이 독창적이다. 무서운 것들과 숨바꼭질하는 아이의 마음 같다. 지진에 비하면 한가하지만, 다다미에 앉아 장지문 틈으로 새어드는 칼바람을 맞고 있으면 꿈속이든 어디로든 숨고 싶을 것이다. 고타쓰(화로를 넣은 틀에 두툼한 이불을 덮어 만든 난방 기구)에 파고들어 쓴 시인지도 모른다. 한겨울의 계절어 ‘후유고모리(冬ごもり)’는 밖이 너무 추우니 바구니 속 새끼 고양이처럼 집 안에 틀어박혀 겨울을 난다는 말이다. 어딘가에 틀어박힌다는 뜻의 ‘고모리’는 한자로 대바구니 ‘롱(籠)’ 자를 쓴다. 용의 머리에 대나무를 얹었다. 불을 뿜는 용의 품에서 겨울을 난다면 든든할까. 추위는 그렇다 쳐도 지진과 쓰나미만큼은 용과 함께 하늘을 날아 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요즘 일본의 가장 큰 두려움은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거대 지진이다. 특히 일본 정부는 ‘난카이(南海) 해곡 거대 지진’을 경고한다. 기상청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서일본 남쪽 해역, 다시 말해 시즈오카, 오사카, 시코쿠, 규슈 남부까지 약 800km에 달하는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난카이 해곡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올해 첫날, 반대편 해안 노토반도에서는 20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큰 지진이 있었다. 일본 내에서는 열도 아래 판들이 움직이는 지각변동이 시작되었으며 거대 지진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오는 7월 도쿄도지사 선거, 오는 9월 새 총리를 뽑는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둔 일본 국민에게는 어느 당이 재해 대처에 유능할지, 어떤 정치인이 시민을 빠르게 구조할지가 주요 관심사다.
그런데 일본인이 바라보는 한국의 가장 큰 두려움은 뭘까. 갑자기 궁금해져서 일본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더니 1초 만에 답장이 온다. 戦争(전쟁). 아, 그렇지. 우린 지금 휴전 중이지. 너무 익숙해져서 종종 잊어버린다. 제발 전쟁만은, 제발 거대 지진만은, 지구상 어디에도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겨울밤에는 영하 10도의 강추위도 견딜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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