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오고 가는 반찬통

강민지 ‘따님이 기가 세요’ 저자 2024. 1. 1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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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퇴근 후 집에서 대충 끼니를 때우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사실은 퇴근할 때부터 걱정이었다. 정신없이 연말을 보내느라 통 장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재료가 무엇인지, 김치라도 남아 있었던지, 모든 기억이 날아가 있었다. 찬장을 탈탈 털어 라면이라도 나오지 않으면 편의점이라도 갈 요량이었다. 반쯤 포기하고 냉장고를 열었을 때, 구석에서 반찬 통 하나를 발견했다. 얼마 전 친구가 직접 만들어 나눠준 장조림 반찬이었다. 깜빡 잊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덕분에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설거지를 끝내고 반찬 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도대체 이놈이 몇 집을 거쳐 다녔을까. 가장 처음에는 내가 엄마의 집으로 빈 반찬 통을 보냈다. 그러곤 이내 김치와 다른 반찬들로 꽉꽉 차 돌아왔다. 그 반찬 통에 내가 직접 구운 케이크를 담아 친구들에게 보냈고 그 통은 또 다른 반찬이나 여러 가지 간식거리가 담겨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왔다. 드라마 시리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이 기억난다. 한 동네에 사는 친구들이 엄마의 심부름으로 이 집, 저 집 반찬을 배달하러 다니던 모습. 우리에게도 나름 비슷한 모습이 있었다.

친구가 독감에 걸려 크게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해 전쯤 친구들이 한창 코로나에 걸려 각자 집에서 격리하고 있을 적 만날 순 없으니, 기프티콘으로 서로의 마음을 전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이제는 만날 수 있으니 직접 마음을 전하고 싶어진다. 난생 처음으로 전복을 샀다. 유튜브 영상을 선생님 삼아 칫솔로 열심히 전복을 손질하고 내장을 뜯어내고, 쌀을 불리고, 야채를 다지고, 한참을 불 앞에 서 죽을 젓고, 간을 본다. 전혀 수고롭지 않았다. 엄마를 닮아 손이 큰 탓에 여러 배를 불릴 양을 해버리고 말았다. 아픈 친구에게 보내고 동네 친구들과도 나눠 먹었다. 응원이나 위로를 기프티콘으로 대신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역시 직접 전할 수 있는 게 좋다. 마음은 직접 가닿는 게 진짜니까.

나의 새해 다짐은 이제 거창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더 많은 돈을 벌게 해 달라거나, 복권이 당첨되게 해 달라거나 하는 실현 가능성 없는 꿈은 꾸지 않는다. 물론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래도 우선인 것은 나의 주변 사람들과 더 나은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투자한 돈이 몇 배로 불어 돌아오길 바라기보다는, 내가 보낸 반찬 통에 어떤 반찬이 담겨 돌아올지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삶이 훨씬 이루기 쉬운 삶이다.

오랫동안 더 나은 삶, 행복한 인생에 대해 고민해 왔다. 지금에야 조금 알 것 같은 건 나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이다. 내가 혼자 애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순간도 지나고 돌아보면 주변의 모두가 나를 지켜봐 주고, 지탱해 주고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한 어른이 자라기에도 마을이 필요하다. 다만 온 마을까지는 아니고, 내가 선택한 이웃들만 있어도 충분하다.

더 이상 실체 없는 두루뭉술한 성공을 꿈꾸지 않는다. 성공 대신 성장하기를 바란다. 나를 둘러 싸고 있는 마을에 의지하며, 틀린 길을 고집하며 밀고 나가지 않고 안전하게 성숙하길 기대한다.

평소 감정 표현이 크지 않은 친구에게 새해 메시지를 받았다. 나의 건강과 행복이 본인의 재산이란 걸 깨달았다는 말이었다. 같은 마음으로 올해를 살아야겠다. 내 가족, 친구들의 건강과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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