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마음을 참지 않기로 했다
2023년에는 일이 몰려 바빴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았으므로 마음을 참아야 했다. 그런데 마음을 참는다는 말은 참 이상하다. 마음을 다잡아 무언가 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마음을 꼭 잡아 가두어 무엇을 하지 않도록 만든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작년에 참았던 마음들을 열거해 보자면 이러하다. 아끼는 사람들을 보고 싶은 마음, 계절의 지나감을 살피는 마음, 걷다가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바람이 나를 지나도록 내버려두는 마음, 좋아하는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니 햇볕을 쬐며 미소를 데우는 마음, 세상의 모서리에 애정 어린 눈길을 퐁당 던지는 마음, 그 파동으로 나 또한 물결치게 되는 마음, 그런 것들을 모두 잘 참고 아껴야 했다. 내야 하는 논문을 제시간에 냈고, 써야 하는 원고를 제시간에 마감했다. 제출해야 할 서류를 미루지 않았고, 성적 마감 시간을 준수했다. 나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할 일을 모두 해냈으니 후련했다. 그런데 그것으로 다 된 걸까?
올해 초에 읽은 임선우의 소설 <사려 깊은 밤, 푸른 돌>(<에픽> 10호)의 ‘선영’은 함께 살던 애인 ‘영하’가 말도 없이 떠나버리자, 슬플 때마다 푸른 돌멩이를 토하게 된다. 돌을 토하면 몸과 마음을 압도하던 슬픔이 말끔히 가신다는 것을 알게 된 선영은 이것이 설사 병이라 해도 낫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병원에 가지 않고 버틴다. 영하를 잃은 고통은 감내하기 힘든 것인데, 돌을 토하고 나면 그로부터 자유로워져 일상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푸른 돌을 통해 슬픔이 전염된다는 사실이다.
수영 선수였으나 교통사고로 어깨를 다쳐 그만둔 후 도벽이 생긴 ‘희조’는 무언가를 훔치지 않고도 하루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선영의 신비한 돌에 의존하며 번번이 돌을 달라고 요구한다. 슬픔을 주는 돌을 베개 밑에 두고 잠에 들면 수영 선수 시절의 꿈을 꾼다는 것이 이유다. 꿈의 내용은 팀에서 제명되거나, 아무리 헤엄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등 악몽에 가깝지만, 꿈속에서만큼은 여전히 수영 선수라는 것이 희조에게 묘한 안도감을 선사한다. 희조는 그 사실을 선영에게 털어놓으며, 오랫동안 외면해 왔던, 수영을 그만두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마주한다. 어차피 수영을 관둘 생각이었으며, 찬물에 들어가는 일이 지겨워지던 참이었다고 덤덤히 말했지만, 그렇게 믿지 않고서는 도무지 그 비극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일 뿐, 희조는 슬펐던 것이다. 희조를 통해 자기 마음을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선영은 도망친 영하를 보러 간다. 영하와 조우한 뒤, 자신이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음을 확인한다. 자기 마음을 완전히 알아채고 나서야, 선영은 구역질을 멈추고 구슬피 울게 된다. 슬픔을 느끼는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나는 괜찮았다. 늘 괜찮아서 문제였지.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으니까.”(<사려 깊은 밤, 푸른 돌>) 터져 나오는 울음을 뒤집어쓰고서 슬픔에 잠겨 온몸이 눅진해지고 나야만, 여기저기 할퀴어 파이거나 제멋대로 무성히 자라나 버린 마음의 생김새를 전부 짚어보고 그 질감을 다 느껴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이성 중심의 사회에서 별 효용이 없어 보이는 감정은 저리 치워두고 마음을 외면하며 할 일을 해내는 것은 결국 충실한 제자리걸음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한 해를 계획하게 만드는 1월에는 마음을 다잡고 무언가 열심히 해보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마음을 꾹 참고 목표한 바를 성취해 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 또한 알고 있다. 그런데 마음을 놓치는 일, 마음을 참지 않고 풀어두는 일, 그래서 마음이 뻗어가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일, 그러다 지쳐 낯선 곳에 주저앉아 저만치 달려 나가는 생경한 마음의 걸음걸이를 관망하는 일 또한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마음을 참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이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
성현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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