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의동 칼럼] 전쟁이 ‘빌드업’되고 있는 한반도
1949년, 남북한은 ‘작은 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격화된 38선 충돌을 통해 전쟁 에너지를 축적해 갔다. 김일성은 1949년 신년사에서 “모든 것을 국토완정(完整)을 위해 바치자”면서 ‘국토완정’을 13차례 언급했다. 신년사를 기점으로 국토완정론은 북한의 최대 슬로건이자 주민을 총동원하는 이데올로기가 됐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계기로 반공국가 체제를 확립한 이승만 정권은 1949년 내내 ‘실지회복’ ‘북벌’ 구호를 내걸었다. 반민특위 해산, 국회 프락치 사건, 김구 암살 등 정권 도전세력을 진압하던 시기와 겹친다. 대통령과 군 지도자들의 언행은 일선 지휘관들의 공격 성향을 강화했다.
미·소 양군의 38선 철수는 충돌의 방아쇠였다. 1949년 1월19일 대북 특수공작기관이 주도한 ‘해주 의거’를 기점으로, 남북은 많게는 수천명을 동원한 전투를 1년 가까이 전개했다. 1949년 5월 연대급 병력이 동원된 개성 전투는 전면전 직전까지 갔다. 충돌이 발생한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강릉은 이듬해 6·25에서 북한군의 공격 지점이었다. 자연지형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어져 어디까지가 남한이고 어디부터가 북한인지 알기 어려운 38선은 분쟁의 불씨가 됐다. 1949년의 38선 충돌과 북한의 치밀한 준비 끝에 이뤄진 한국전쟁은 성격이 다르지만, 38선 충돌이 1년 뒤 전면전을 잉태한 것은 분명하다.
신년의 한반도 정세는 전쟁이 ‘빌드업’되던 1949년을 떠올리게 한다. 9·19 군사합의 파기, 연락채널 두절, 최고당국자 간의 ‘말폭탄’으로 전쟁 에너지는 1949년 못지않게 충만해 있다. 북한의 사고와 논법에 익숙한 전문가들이 한반도 전쟁을 언급하기 시작한 것도 불길하다. 1990년대 북·미 협상 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는 “2024년 동북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최소한 염두에는 둬야 한다”고 했다. 북한 핵 전문가 시그프리드 헤커 교수와 미들베리국제문제연구소 로버트 칼린 연구원도 “1950년 그의 할아버지처럼 김정은이 전쟁을 하기로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헤커와 칼린은 북한이 한·미·일 군사협력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노릴 수 있다고 봤다.
북한이 그 취약 지점 후보지인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1949년 충돌이 어느 쪽 영토인지 분명치 않은 내륙에서 벌어졌다면, 이번엔 경계선을 그릴 수 없는 바다가 전장이 될 판이다. 이미 세 차례 교전이 벌어진 바 있고, 연초부터 포격전의 공방이 오갔던 서해상에서 충돌을 막을 빗장이 풀렸다. 북한 해군의 기동훈련과 포사격 훈련이 본격화되는 3월 말이 1차 고비다. 전문가들은 남북 간 소통채널이 끊긴 상황에서 우발적 충돌이 확전으로 번질 가능성을 우려한다.
북한은 대한민국을 제1의 적대국이자, 불법의 주적으로 간주하겠다고 한다. 한국과의 민족관계를 포기하고 70여년 남북관계의 근본적인 전환을 꾀하고 있다. 전쟁이 나면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키겠다”고도 했다. ‘블러핑’으로 넘기기엔 상황이 매우 엄중하다.
윤석열 정부와 보수세력들은 ‘가짜 평화보다 차라리 전쟁이 낫다’는 인식을 유포해 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6일 “북한이 도발해 온다면 몇배로 응징할 것”이라고 했다. 호승심(好勝心)에 불타는 국방부 장관은 ‘즉시, 강력하게, 끝까지’를 외친다. 남북 긴장을 높이는 쪽이 정권 운영에 유리하다는 판단도 있을 것이다. 남북 최고책임자들이 ‘돌아갈 다리’를 불태운 채 극한 언사를 주고받으니 유연한 접근이 설 자리는 사라졌다. 남북 간에 증오와 적대의식이 고양되면서, 1949년에 그랬듯이 ‘전쟁’이란 단어가 익숙해지고 있다. 한국 사회가 전쟁을 숙명으로 여기게 될까 두렵다.
1949년과 달리 고도 개방경제 체제를 확립한 한국은 ‘전쟁 리스크’가 커지면 경제의 밑동이 흔들린다. 실제 전쟁 여부와 무관하게 리스크만으로도 금융시장은 충격을 받는다. 올 들어 국내 증시의 외국인 매도세가 심상치 않은 이유다. 사정이 그런데도 다른 모색 없이 ‘전쟁불사’만 외치는 것은 국정 책임자의 자세가 아니다.
전쟁을 겪어본 이들은 ‘좋은 전쟁은 없다’는 걸 뼈저리게 안다. 고 콜린 파월 미 국무부 장관은 수많은 전장을 누비면서 ‘군대만으로 평화와 번영을 지킬 수 없다’는 소신을 갖게 됐다. 한반도에서는 전쟁을 해본 적도 없고,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도 모르는 지도자들이 정세를 백척간두로 몰아가고 있다.
서의동 논설실장 phil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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