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저출산, 기업을 바꾸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다
지난 20년간 정부가 저출산 대책에 막대한 예산을 투여하고도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일 뿐 아니라 급속히 하락하는 추세다. 정부의 다양한 정책들이 별다른 효과가 없어 보인다. 보여주기를 위한 전시행정, 부처와 기관별 예산 나눠 먹기의 폐해가 커 보인다. 실효성이 없는 정책과 해당 예산은 과감히 없애버리고 효과가 큰 몇개의 정책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저출산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업을 통제해야 한다. 기업을 건드리지 않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도 출생률이 반등되지 않는 대표적인 이유이다. 저출산의 원인은 명확하다. 여러 설문조사에서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 1위는 아이를 키우는 데 경제적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으로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 원인은 높은 사교육비 부담이다. 즉 저출산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는 부모들의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모든 교육정책의 방향을 사교육비 경감에 맞출 필요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노동시장에서의 학벌주의를 약화시켜야 한다. 부모들이 막대한 사교육비를 자녀에게 투자하는 이유는 자녀들이 명문대에 진학해 좋은 일자리를 얻게 되길 바라서이다. 만일 좋은 일자리를 구하는 데 학벌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실력과 업무적합성만 고려된다면, 부모들은 자녀의 명문대 입학에 지금처럼 집착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사교육비에 대한 과도한 투자도 멈출 것이다. 사교육비 부담이 사라진다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청년들도 크게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동시장에서 학벌주의를 약화시킬 수 있을까? 기업이 직원을 채용할 때 출신학교에 대한 블라인드 제도를 도입하도록 의무화하고 이를 철저히 감독하는 것이다. 서류와 면접에서 학벌이 아닌 실력과 업무적합성만 본다면 명문대 졸업에 대한 국민들의 집착은 상당히 약화될 것이다. 이 정책을 공기업에서 시작해, 대기업과 중견기업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드러난 저출산의 두 번째 이유는 출산과 양육 시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이다. 이 역시 기업이 변화해야 해결될 수 있다. 적어도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부모가 일과 양육을 병행할 수 있도록 재택근무, 유연근무제, 단축근무, 연월차와 반차의 자유로운 사용 등을 보장해야 한다. 인센티브와 재정 지원을 통해 기업의 변화를 유도하고, 그래도 변화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이를 의무화시켜야 한다. 육아휴직의 경우 대기업은 여성에 대해 1년 정도를 보장하고 있으며 여전히 많은 중소기업은 여성에 대해서도 육아휴직을 보장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은 남성에 대해서도 6개월 이상 육아휴직을 보장하도록 정부가 유도해야 하고, 이를 점차 중소기업에까지 확대해야 한다. 여성만 육아휴직을 쓰면 기업이 여성 고용을 기피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남성 육아휴직이 선진국 수준으로 보장되게 유도해야 한다.
현재 정부는 육아휴직 급여액을 인상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두고 있는데, 급여액을 많이 인상하더라도 기업이 육아휴직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불이익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한 현재 분위기에선 육아휴직이 크게 증가하기 힘들다. 또한 육아휴직 시 기업이 대체인력을 고용하지 않고 부서의 다른 직원들에게 업무를 분담시키는 상황에선 눈치가 보여 육아휴직 사용이 힘들다. 따라서 육아휴직 시 대체인력 고용을 의무화하고, 이에 들어가는 추가 비용을 정부가 지원해 기업이 직원의 육아휴직으로 인해 감수해야 하는 손해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육아와 관련해 부당해고나 인사상 불이익을 줄 경우 징벌적 벌금을 부과해 기업 인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국가와 기업이 함께 미래의 노동인재를 키운다는 생각으로 육아친화적인 기업문화를 정착시켜야만 저출산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김진영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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