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비대위원장님,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만나주세요

한겨레 2024. 1. 17. 18:5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해 11월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전세 사기 발본색원 및 충실한 피해 회복 지속 추진을 위한 관계부처 합동브리핑에서 방안을 발표하던 도중 전세 사기 피해자인 최지수 씨가 쓴 에세이 ‘전세지옥: 91년생 청년의 전세 사기 일지’의 부분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왜냐면] 이철빈 | 전세사기피해자대책위 위원장

한동훈 비대위원장님, 당신이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지난해 11월1일, 정부의 전세사기 대응 합동 브리핑에 최지수 작가의 책 ‘전세지옥’을 들고나온 것을 기억합니다. 그 책을 전세사기 대응의 기본으로 삼겠다던 발언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십니까? 최지수 작가는 그 브리핑 장면을 보고, 한동훈 비대위원장님의 연락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기자들에게 한동훈 비대위원장님이나 정부 관계자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꼭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전세사기 문제 해결을 위해 여러 제안을 하고자 기다렸지만, 그 누구도 연락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지난달 원양상선을 타고 한국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저는 최지수 작가보다 2살 어린 1993년생 전세사기 피해자입니다. 2021년 11월, 첫 전셋집에 부푼 마음으로 이사했습니다. 근저당이나 압류가 없는 등기부등본을 신뢰했고, 정부가 공인한 민간임대주택에 정부가 보증하는 버팀목대출을 받아 입주했습니다. 그런데 계약 당시 보증보험 가입을 약속한 임대인이 연락이 계속 안 됐고, 수상한 마음에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니 계약 당시 없던 세무서 압류가 걸려 있었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던 그때로부터 2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알고 보니 제 집주인은 수도권 일대에 1000채가 넘는 주택을 소유했던 ‘빌라왕’ 김대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2022년 10월에 63억원이 넘는 종부세와 수천억 원의 보증금 채무를 남기고서 사망했습니다. 이후 피해자들은 상속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적법한 집주인 없이 방치됐습니다. 피해자들은 시설관리도 되지 않는 주택에서 힘겹게 버텨야 했고, 몇 년 전에 비해 두세 배 불어난 전세대출 이자를 갚아왔습니다. 고대하던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고도 이사할 수 없어 포기하고, 개인회생을 위해 퇴사하거나 신혼부부가 이혼하는 일이 줄지어 발생했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희만 그런 것이 아니더군요. 인천, 대전, 대구, 부산, 수원 등 전 국토가 전세사기의 화마에 휩싸여 있습니다. 현재까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집계한 피해자 숫자만 1만명이 훌쩍 넘어섰습니다. 저희에게 국민의 삶을 지켜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렇게까지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됐음에도 저희 피해자들은 지금까지 정부·여당과 단 한 번도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전세사기 피해자를 위하겠다던 한동훈 법무부 장관님도,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님도, 여당인 국민의힘 지도부도, 대통령실 그 어디서도 저희 피해자들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수십 번의 면담 요청에도 답이 없어서 오죽하면 지난해 11월28일, 대구에서 올라온 전세사기 피해자 정태운씨는 “국민의힘 당원 탈당하기 전까지 딱 한 번만 만나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저희 피해자들은 어떤 답변도 받지 못한 채 지금도 국회와 대통령실,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님, 저희 피해자들은 당신의 ‘동료 시민’이 되고 싶습니다. 올해 1월1일 국민의힘 신년인사회에서 언급하셨던 “재해를 당했을 때 시민에게 찜질방을 내어주고, 지하철에서 행패를 당하는 낯선 이를 위해 나서는 것”과 전세사기 피해자를 위해 손을 내미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전세사기 피해를 당해 피땀 어린 보증금을 빼앗기고, 신용불량 위기에 처하고, 집에서 쫓겨나는 ‘동료 시민’들이 여기 있습니다. 특별법이 제정됐지만,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피해자가 여기 있습니다. 특별법 피해자로 인정받아도 까다로운 요건 때문에 쓸 수 있는 대책이 없어 한숨 쉬는 피해자가 여기 있습니다. 특별법 대책을 샅샅이 뒤져봐도, 보증금 돌려받는 대책 없이 빚을 내어 집을 떠안으라는 말에 눈물짓는 피해자가 여기 있습니다. 이 추운 날에 경매 유예가 되지 않아 무자비하게 내쫓기는 다가구주택 피해자가 여기 있습니다. 아무리 피해 상황을 호소해도 도와주는 곳이 없다며 절망하며 생을 등지고 싶지만, 남아있는 가족을 생각해 죽을 용기조차 없는 피해자가 여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우리를 한번 만나주십시오. 같이 머리를 맞대어 이 전세사기 문제를 풀고, ‘동료 시민’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봅시다. 국민의힘은 정말로 국민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집권여당의 역할에 충실해 주십시오. 오늘도 추운 날씨에 거리에서 외로이 기다리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눕시다. 기다리겠습니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