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골 없이 뼈만 부딪히는 남북’…경고등도 경적도 없는 위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제1적대국, 전쟁, 초토화 같은 말폭탄으로 위협 수위를 높이자 윤석열 대통령도 “몇 배로 응징할 것”이라며 ‘강 대 강’ 충돌 불사 입장으로 맞서고 있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동족이 아닌 적대국으로 완전히 새롭게 규정하고 이전 합의도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갈등 관리가 훨씬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대한민국을 제1적대국”으로 헌법에 명시하고 북방한계선(NLL)도 인정하지 않겠다고 밝힌 사실이 지난 16일 보도되자 윤 대통령은 즉각 국무회의에서 “북한이 도발해 온다면 우리는 이를 몇 배로 응징할 것”이라고 응수했다. 북한은 연말 당 전원회의에 이어 김여정 부부장 담화로 남측에 대한 위협과 비방으로 긴장 수위를 높여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대한민국을 균열시키기 위한 정치 도발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앞서 국방부와 통일부도 북한이 총선에 개입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전쟁불사론’ 같은 브레이크 없는 위협은 남측 총선뿐 아니라 국내외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온 고도의 전술이다. 대외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와 국제사회가 사이가 벌어진 틈을 이용해 ‘북·러 군사밀착’을 새로운 동아줄을 챙겼다. 미·중 갈등,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심상치 않은 중동 정세도 북한으로서는 기회다. 특히 내부 단속도 큰 부분이다. 전쟁이 멀리 있지 않다는 긴장·불안감을 고조시켜 내부 결집과 충성도를 높이려는 것이다.
남측 문화에 빠진 북한 인민들의 사상 단속을 위해 ‘주적’으로 규정해 적대적 분위기 고조시키려는 의도도 있을 수 있다. 김 위원장은 한류 등 외부 문화 차단을 위한 ‘반동사상문화배격법’(2020), 청년층을 집중 단속하는 ‘청년교양보장법’(2021), 남측 말투 유입을 막는 ‘평양문화어보호법’(2023)을 연이어 쏟아냈다.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도 ‘정치사상교양사업’을 강조하며 사상통제 강화도 예고했다. 안보 문제를 내세워 내부 결집을 다지고 1인 독재체제를 공고화하는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대북 강경론으로 이전 문재인 정부와 차별점을 강조해왔다. 후보자 시절이던 2022년 1월 소셜미디어(SNS)에는 “주적은 북한”이라고 올려 주적론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대통령실은 북한의 공세가 4월 총선을 앞두고 국론을 분열하려는 ‘대남 심리전’이라고 보고 있으며 ‘북한 도발에 1초 안에 응수’라는 강력 대응을 예고했다.
윤 대통령이 이처럼 북한이 말폭탄을 쏟아낼 때마다 더 큰 말폭탄으로 응수하면 되레 북한의 노림수에 말려들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특히 총선을 앞둔 상황이어서 자칫 남북 갈등이 국내 정치화할 수 있다는 우려 목소리도 나온다. 북한이 한반도 전쟁 위협을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내치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도 보수층 결집을 가져올 대북 강경정책을 펴서 선거에 불리할 게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남북관계 관리는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남북 간에는 1994년 ‘서울 불바다’ 발언, 2010년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 도발, 2015년 목함지뢰사건 등 여러 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남북은 동족 관계’라는 전제뿐 아니라 과거 남북합의가 무효화되고 남북통신선도 끊긴 상태다. 남북 간의 우발적 충돌을 방지할 경고등과 경적도 사라졌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17일 통화에서 “북한이 (남북관계) 기본이었던 7·4남북공동성명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도 무력화시켰고, 9·19군사합의도 파기했다”면서 “소위 말하는 합의 규범과 합의 정신, 합의 내용 그리고 대남 대화기구가 싹 다 없어지고 사실상 남은 것은 정전협정과 교전국 상황 두 개뿐”이라고 짚었다. 홍 연구위원은 “과거 북한에는 어떤 도발을 하든 규범과 정신, 합의 내용이 있는 상태에서 후속적으로 수습하는 대화 기구가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없어서 연골 없이 뼈만 계속 마주치는 위험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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