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세계 민주주의 80년대 수준”···권위주의는 선거를 먹고 자란다

신경립 논설위원 2024. 1. 17.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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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의 해, ‘아노크라시 시대’ 막 오르나
1월 방글라데시 총선, 하시나 장기 독재로 더 기울어져
러 외에도 인니·印 ‘국민 지지’ 내세워 非민주의 길 예상
‘결함있는 민주주의’ 강등 美 11월 대선, 글로벌 시험대
트럼프 재집권시 전세계 ‘민주주의 후퇴’ 확산 속도낼 듯
[서울경제]

1월 7일 방글라데시 총선에서 집권 아와미연맹(AL)이 전체 의석의 78%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부정선거를 우려한 제1야당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과 일부 군소 정당들이 보이콧을 하고 최소 1만 명의 야권 인사들이 체포됐다는 인권단체의 보고서가 나올 정도로 대대적인 야권 탄압 속에 치러진 선거 결과다. 투표율은 직전 2018년 총선의 절반 수준인 41.8%에 그쳤다. 선거의 공정성과 현지 인권 문제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문제 제기를 뒤로 한 채 통산 5번째 임기를 맞은 셰이크 하시나 총리는 2029년까지 철권을 휘두르며 장기 독재의 길을 가게 됐다.

미국 공화당 첫 경선인 아이오와 코커스가 열린 15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024년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슈퍼 선거의 해’다. 1년 동안 약 42억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76개 나라에서 크고 작은 선거들이 진행된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선거가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로 진행되는 올해는 민주주의가 가장 큰 도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혐오 정치와 포퓰리즘, 가짜뉴스로 표심을 자극하는 권위주의 성향의 정당과 지도자들이 유권자들의 불안과 불만에 파고들며 전 세계 곳곳에서 영향력을 키울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의 2023년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글로벌 민주주의는 1986년 수준으로 후퇴한 상태다. 2022년 기준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 거주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13%인 10억 명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72%에 달하는 57억 명이 독재 정권의 지배를 받고 있다. 권위주의로 전환 중인 국가는 역대 최다인 42개국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부설 기관인 이코노미스트인텔리전스유닛(EIU)의 ‘민주주의 지수’도 비슷한 현실을 보여준다. EIU가 ‘완전한 민주주의’로 꼽는 국가는 2022년 기준 노르웨이·스위스·대만·독일·일본·영국·한국 등 24개국뿐이다. 이탈리아·인도·브라질·인도네시아 등 48개국은 공정 선거와 기본적인 시민 자유가 보장되지만 언론의 자유 등에서 제약이 감지되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분류됐다. 자유민주주의의 본산인 미국도 2016년 이래 ‘결함 있는 민주주의’에 머물고 있다. 멕시코·튀르키예 등은 선거의 자유와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하이브리드 체제’로 분류된다. 중국이나 러시아, 이란과 같은 권위주의 정권으로 전락하기 직전 단계라는 의미다.

‘슈퍼 선거’ 민주주의에 최대 도전

이런 상황에서 올해 치러질 선거 중 상당수는 사실상의 독재자에게 ‘민주적 선출’이라는 포장을 해주거나 새로운 권위주의 지도자 탄생의 길을 열어주는 과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등장이 상징했던 민주주의 후퇴 현상이 올해 더욱 가속화하며 점점 더 많은 국가들이 민주주의(democracy)와 독재(autocracy)의 중간 단계인 ‘아노크라시(anocracy)’ 수준으로 후퇴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제기된다. 미국 정치체제 연구기관인 조직적평화센터(CSP)와 바버라 월터 미국 UC샌디에이고 정치학과 교수 등은 직전 대선이 열린 2020년에 미국이 일시적 ‘아노크라시’ 상태에 빠졌다고 진단한 바 있다. 당시 미국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선거 패배 불복과 강성 지지자들의 국회의사당 폭력 점거 사태(2021년 1월)로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올해 4~5월 총선이 예정된 인도 역시 권위주의로의 전환이 우려되는 국가다. 높은 경제 성과와 글로벌 영향력 확대에 힘입어 국민들의 각광을 받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3연임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소수 민족을 억압하는 힌두 민족주의와 언론 장악 등 그의 비민주적 행보가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2021년 인도를 ‘선거제 독재국가(electoral autocracy)’로 규정한 V-dem은 인도에 대해 “지난 10년간 가장 권위주의화된 국가 중 하나”로 분석한다. 일본 매체인 닛케이아시아는 “모디 총리의 집권 하에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로 바뀌고 있는 인도는 ‘방 안의 코끼리’”라고 진단했다. 방 안의 코끼리는 모두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커다란 문제를 가리킨다.

2억 명 넘는 유권자들이 2월 14일 대통령 직선 투표에 참가하는 인도네시아도 심상치 않다. 지난해 선거법 개정으로 피선거권을 얻은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장남이 부통령으로 등극할 가능성이 거론되는 가운데 조코위 대통령이 사법 간섭으로 ‘정치 왕조’를 구축해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3월 러시아 대선에서는 정적을 모두 제거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5선을 예약했다. 6월에 열리는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극우 성향을 띠는 반이민 정당들이 세력을 키울 것으로 예상된다.

젊은 세대 ‘민주주의 선호’ 57% 그쳐

올해의 선거들 중 가장 중요하고 파급력이 큰 것은 11월로 예정된 미국 대통령 선거다. 미국을 ‘아노크라시’로 내몬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공화당 후보로 확정돼 민주당 소속인 조 바이든 대통령을 꺾고 재집권할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달 15일 공화당의 첫 경선인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에서 51%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며 ‘대세론’을 입증했다. 윤영관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은 “수차례에 걸쳐 ‘정치 보복’을 언급해온 트럼프가 다시 권력을 잡는다면 민주주의의 기본 틀과 제도, 장치들을 모두 뒤흔들 가능성이 크다”면서 “문제는 그것이 미국 내에서 끝나지 않고 민주주의의 모델 국가인 미국을 관찰하는 많은 국가들에도 부정적 영향을 크게 미칠 것이라는 점”이라고 우려했다. 래리 다이아몬드 스탠퍼드대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서 “트럼프 재집권은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글로벌 독재주의에 힘을 싣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1세기 들어 두드러지는 민주주의 퇴조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경제 양극화와 금융 위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매체 보급과 가짜뉴스 확산, 지정학적 갈등 고조 등이 모두 민주주의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강권적 독재 정치를 펴는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의 높은 인기는 경제 빈곤과 사회 불안이 심각한 저소득 국가에서 중국처럼 강력한 권력을 기반으로 한 경제 성장 모델에 대한 국민 호응이 높다는 점을 보여준다. 미 국제공화주의연구소(IRI)의 여론조사에서 방글라데시 국민의 53%는 ‘국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답하면서도 하시나 총리의 국정 운영에 70%라는 높은 지지도를 보였다. 국제민주주의와 선거지원기구(IDEA)의 케빈 카사스 자모라 사무총장은 FT에서 “민주주의가 국민들의 요구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인식과 사회적 불안 고조,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나 트럼프 당선처럼 서구의 도덕적 권위에 흠집을 낸 일련의 사건들이 작용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권위주의 강국인 중국의 영향력 확대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과거 미국이 제공해온 국제 공공재의 축소와 그로 인한 글로벌 강대국 간의 각축전이 민주주의 후퇴를 부추겼다”고 설명했다.

특히 최근에는 권위주의 체제를 수용하는 젊은 유권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픈소사이어티재단(OSF)이 지난해 30개국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86%가 민주주의 체제를 선호한다고 답한 반면 18~35세의 젊은 층에서는 이 수치가 57%에 그쳤다. 해당 연령대의 42%는 군부 통치를 지지한다고도 했다. 아프리카 사헬 지역에서 연쇄적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는 데는 국가가 직면한 문제를 강권 정치로 해결하려는 젊은 유권자들의 인식이 적잖이 영향을 미쳤다고 FT는 분석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맥코트니 민주주의연구소의 2022년 설문에서도 미국 ‘Z세대(18~25세)’의 절반가량은 민주주의 또는 권위주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워싱턴포스트(WP)는 2차 세계대전 등 권위주의 체제의 파괴적 위협을 모르고 자란 젊은 세대들이 기후 위기나 경제적 어려움 등 당면 과제를 신속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민주주의의 교착 상태에 대해 실망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민주주의 대체할 시스템 없어···보완 필요”

일각에서는 희망적인 반전도 보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이후 극우 성향으로 치닫던 영국의 집권 보수당은 올 하반기로 예상되는 총선을 앞두고 지지율 회복을 위해 중도보수 노선으로 회귀하고 있다. 사법부와 언론, 시민단체 등의 꾸준한 감시와 비판이 정치의 주도권을 다시 온건한 유권자들에게로 돌려놓고 있는 것이다. 박인휘 교수는 “지금은 자유주의 질서의 균열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지만 민주주의를 대체할 정치 시스템은 없다”면서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큰 폭의 조정 국면을 거쳐 보완책이 생겨나면 민주주의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상황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손병권 중앙대 정치국제학 교수는 “SNS 보급과 가짜뉴스 양산, 경제 양극화 등 민주주의 약화를 자극하는 요인들은 일시적 문제가 아니라 지속성을 갖고 있다”며 “트럼프의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민주주의 후퇴 현상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도 예외일 수는 없다. 손 교수는 “우리나라도 진영 논리와 팬덤에 기댄 포퓰리즘이 판을 치는 탈진실(post-truth) 시대를 맞아 민주주의 위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아노크라시로 흐르지 않게 하려면 정당이 문지기 역할을 할 수 있게 유권자들이 감시 기능을 제대로 하고 권력 간의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작동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려면 유권자들의 현명한 판단과 함께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신경립 논설위원 kls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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