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 때 혼자 앉을까 걱정한 적 있다면···90년대 고등학생 이야기로 돌아온 수신지 작가[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
2024년 남다른 생각과 단호한 행동으로 없던 길을 내는 문화인들을 만납니다.
“엄마에게 영광의 1등을 안겨드리고 싶었는데 2등도 못한다면 엄마 볼 면목이 없다.”
수신지 작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런 일기를 쓰는 학생이었다.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반장을 도맡아 하는 학생.
<며느라기> <곤> 등 현실 비판적인 작품을 선보여온 수신지 작가가 이번엔 고등학생들의 일상 이야기를 그린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로 돌아왔다. 그를 지난 16일 서울 연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의 등장인물은 이렇다. 전교 1등이자 자타공인 모범생인 반장 이아랑, 아랑 못지않게 공부를 잘하지만 ‘공부만’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진 않은 곽연두, 성적과 관계없이 성실하게 공부하는 하은. 작가는 1990년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세 사람의 학교생활과 이들 간의 우정, 경쟁심, 질투심, 죄책감 같은 미묘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반장인 아랑은 언제나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 선생님이 자습시간에 “반장은 떠든 사람 이름 적어줘” 하고 나가버리자, 자기 공부는 못하고 고민하며 반 친구들 이름을 적는다. 하지만 나중에 만난 선생님은 누가 떠들었는지 딱히 궁금해하지 않는다. 연두는 만년 2등이다. 친구 아랑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공부뿐 아니라 놀기도 잘하는 애로 보이려 애쓴다. 친한 친구들이 전교 1, 2등인 은은 가끔 두 친구가 하는 ‘공부 농담’을 못 알아듣는다. 하지만 티 내진 않는다.
세 캐릭터 모두에게 작가의 모습이 조금씩 녹아 있지만, 가장 비슷한 것은 아랑이다. “주인공 아랑이 저와 가장 가까운 스타일이에요. 학교 다닐 때 굉장히 모범생이었어요. 선생님 말씀 엄청 잘 듣는 학생. 전 대부분 학생들이 사실 그런 것 같거든요. 약간의 일탈은 할지언정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시험 때는 공부하고. 그런 학생들이 주인공인 만화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만화는 2011년 대한민국창작만화공모전에 내 대상을 받았던 짧은 만화를 장편으로 풀어낸 것이다. “공모전 이후 독립출판으로 1권을 냈어요. 그러다 다른 돈 버는 일들에 밀려서 마무리를 못했죠. 이게 제가 만들어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제 기억 속 이야기들이기도 하잖아요. 이러다 다 잊어버리겠다는 위기감이 들어서, 더 미루지 말고 해보자고 했어요.”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에는 극적인 사건이 없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만화에서 등장할 법한 ‘일진’ 같은 빌런 캐릭터도 없다. 그보단 언젠가 나도 한 번쯤 겪었던 것 같은 일, 해봤던 것 같은 생각들이 아랑과 연두, 은을 통해 펼쳐진다. ‘나도 이번엔 반장 한번 해볼까’ 싶었는데 반 아이들이 다른 친구만 추천해 속으로 실망했던 경험, 세 명이 친한데 수학여행 갈 때 버스에 혼자 남겨질까봐 내심 불안했던 경험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밋밋해서 스토리로 잘 나오지 않았을 수 있죠. 저는 어릴 때 만화 볼 때도 공감되는 만화 주인공이 잘 없었기 때문에 한번 그려보고 싶었어요.”
‘사이다 복수극’이나 ‘타임슬립’ 같은 내용의 만화가 유행하는 시대에 그는 늘 이렇게 조금 다른 결의 만화를 만들어왔다. “굉장히 사소한 일상인데, 뭔가 하나가 좀 다른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 관심 있게 보는 콘텐츠들이 그래요. 장르물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고요.” 트렌드가 신경 쓰이진 않을까. “그런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해서 잘되면 제일 좋고, 안되면 어쩔 수 없다는 편이에요. 무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고, 노력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고요.”
특별한 타깃층을 염두에 두진 않았지만,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통해 어린이, 청소년 독자층이 생겼다. “처음에는 이 만화 장르를 ‘드라마’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어린이 독자들이 좋아해주셔서 ‘어린이 만화인가?’라는 생각도 해요. 아이가 있는 부모님들이 함께 보기도 하고, 배경이 1990년대다 보니 연령대가 좀 있는 분들이 보는 것 같아요.”
그는 <며느라기>에서는 너무 일상적이어서 차별이라고 느끼지도 못했던 여성 차별 문제를, <곤>에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임신중지 문제를 담백하게 풀어냈다. 언제부턴가 그의 작품에는 ‘페미니즘’이라는 키워드가 따라붙는다. “전혀 안 부담스럽고, 오히려 좋죠. 제가 알고 있는 것에 비해 크게 조명을 받은 면이 있어서 민망하긴 해요. 사실 관심이 없었는데, 하면 할수록 관심이 생기는 것 같아요. 시대 흐름도 그렇고요. 저에게 주어진 즐거운 주제 같아요.”
그는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연재가 끝난 뒤에는 ‘호주제 폐지’를 주제로 한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곤> 이후에 하고 싶었는데 좀 버거웠어요. 호주제 폐지가 굉장히 큰 일인데 ‘낙태죄’랑 비슷하게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요? 저도 그렇고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없어졌는지 궁금해요. 과거의 굵직한 여성사를 재미있게 기록 만화로 그려보고 싶어요.”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그가 만든 1인 출판사인 ‘귤프레스’를 통해 6개월에 한 번씩 단행본으로 출간 중이다. 보통 온라인상으로 작품을 발표한 뒤 책으로 엮어내는 요즘 방식과는 또 다르다. “웹으로 연재한 뒤 책으로 내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계속 그런 식으로 해왔기 때문에 좀 지겨웠어요. 책을 좋아하고, 책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책으로만 연재하고 있어요. 연재의 느낌을 주기 위해 6개월 단위로 내고 있고요.”
현재 3권까지 나온 단행본은 오는 6월 4권이 출간된다. 그는 10편까지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게 친구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거든요. 학창 시절에 우정이라는 게 엄청 큰 영향을 미치죠. 중요한 만큼 어려운 경우도 많고요. 이런 만화 속 캐릭터도 친구처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아니더라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가진 캐릭터가 존재한다는 것에 위로받았으면 좋겠어요.”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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