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령없는 바보판사, 제겐 기분좋은 별명"

이승윤 기자(seungyoon@mk.co.kr), 강민우 기자(binu@mk.co.kr) 2024. 1. 1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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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임 법조계 IT 전도사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
툭하면 재판지연 문제 큰데
정반대 길 걸은 판사 표상
36년간 판결문 1만건 넘어
"재판은 억울함 푸는 방편
AI로 신속·효율성 높여야"

"요령 없이 어려운 재판을 뒤로 미루지 않고 다 한다고, 저를 '바보판사·바보부장'이라고 부르는 판사가 있었습니다. 그 닉네임이 저는 좋았습니다."

'재판 지연' 문제가 화두가 되는 시기에 정반대의 삶을 걷다 퇴임하는 판사가 있다. 이달 말 정년퇴임하는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65·사법연수원 14기)다. 그는 지난해에도 형사합의30부를 맡아 2월부터 12월까지 3234건의 재정신청사건을 처리했다. 기소명령 인용률은 1.36%까지 올라 3배 이상 늘어났고, 해당 기간 미제 사건은 1687건에서 1269건으로 줄었다. 36년간 작성한 판결문 수는 1만201건에 달한다. 그는 "매일 누적 거리로 1만보씩 걷고 일요일 새벽 등산을 정기적으로 해서 신체 활력을 유지한 것이 그 토대"라며 "일상의 자세를 '호기심·탐구심·열정'으로 이타심에 기초해서 재판 업무에 몰입했고, 재판 업무를 노동이라고 여기지 않고 당사자 사이의 억울함을 푸는 방편이라고 여기니 일 자체에서 큰 보람을 느끼면서 지냈다"고 말했다.

그는 일찍부터 정보기술(IT)을 법조계에 전파하는 디지털 전도사 역할을 해 '법조계의 스티브 잡스'라는 별칭도 얻었다. 컴퓨터·스마트폰 활용을 체득하고 IT 마인드를 일상에서 구현한 점도 재판 업무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에버노트 전자메모 앱과 타자를 대신한 음성인식 기법을 활용한 것도 업무에 큰 도움이 됐다.

그는 "퇴임에 발맞춰 마침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이 생성형 인공지능(AI) 서비스를 내놓아 저에게 새로운 미션을 준 느낌"이라며 "지난주 정년퇴임 법관 만찬 자리에서도 조희대 대법원장께 챗GPT 이용법을 시연해드리고, 법원 판결문 작성 AI 도우미의 필요성을 말씀드렸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이미 판결문을 학습한 생성형 AI 서비스들이 출시되고 있는 만큼, 개인정보 보호 이슈가 있지만 한국도 법조 AI 서비스 도입을 준비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날 인터뷰 중에도 그는 '나는 학교 폭력 피해자인데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다. 직접 고소장을 내야 하는데 고소장 샘플을 만들어달라'는 명령을 챗GPT4에 내렸고, 내용만 채우면 되는 고소장 양식이 줄줄 뜨는 모습을 시연해 보였다. 지난주에 이른바 AI 사총사(클로바X, 빙, 챗GPT, 구글 바드) 설치·활용법을 촬영해 법원 내부 게시판에 공유한 것도 판사들이 이 같은 서비스 사용법을 알아야 한다고 봐서다.

그는 최근 법관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견 법관들의 사표가 많은 것에 대해서는 "가장 먼저 성과와 보상 체계가 정당하게 작동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어떤 나라, 어떤 조직이라도 성과와 보상 체계가 무너지면서 존속되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재판에 몰입할 수 있는 다양한 동기부여 체계가 속히 확립돼야 하고, 지나친 경쟁은 아니라도 선의의 경쟁 체제는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법관 개인이 기대어야 할 밧줄은 '이념·진영·국민정서법'이 아니라 '헌법·헌법정신·법률·확립된 선례·공평한 정의감'이 돼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기억에 남는 판결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구로공단 농민 토지수용 손실보상금, 4대강 한강수계, 혈우병 관련 에이즈 감염, 아기 기저귀 특허분쟁, 군내 가혹행위 사망자 등 수많은 사건을 했고, '법창에 비친 초상화'라는 무료 배포 전자책에 전부 수록해뒀다"며 "많은 사건이 오랜 기간에 진행되던 것을 물려받아 제 임기 중에 후임 재판부로 미루지 않고 처리해 당사자의 한을 풀어주곤 했다"고 말했다.

퇴임 이후에는 마음이 맞는 후배들과 소규모 사무실에 합류해 변호사 일을 하면서 '디지털·AI 연구소'(가칭) 같은 일도 해볼 계획이다. 그는 "대중의 '디지털·AI 정보 격차' 해소에도 유튜브와 글을 통해 이바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승윤 기자 / 강민우 기자 / 사진 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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