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은 도망, 정부는 외면…단전단수 집에 버려진 전세사기피해자들
지난 15일 오후 8시쯤 인천시 계양구의 낡은 연립주택. 복도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자 퀴퀴한 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전세사기 피해자인 허민우(25)씨가 연두색 현관문을 열자 복도에 손가락 마디만큼 찬 물이 밀려 작게 물살이 일었다. 허씨는 “어제 저녁에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물을 뺐는데도 이 정도네요”라며 멋쩍게 웃었다.
허씨는 지난해 2월 집주인으로부터 ‘파산하겠다’는 문자를 받았다. 주택 수백채의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집주인 이모씨와 일당은 사기죄로 검찰에 불구속 기소됐다. 그 이후 집주인과는 연락이 끊겼다. 지난해 8월 허씨는 전세사기피해자로 인정됐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허씨는 전역 후 모은 목돈과 대출로 마련한 전세금 8000만원을 여전히 변제받지 못했다. 그는 집을 스스로 낙찰 받을 수 있는 선순위임차인이며 아직 자택의 경매를 진행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긴급주거지원 등 정책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지자체의 지원도 받지 못했다. 허씨에게 결국 남겨진 선택은 이 집에서 그냥 사는 것이었다. 살아야하는데 이 집은 살 수 있는 집이 아니었다. 입주 후 생긴 누수는 지금도 매일같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집은 안팎으로 바닥에 물이 차 물을 빼주지 않으면 양동이로 물을 퍼낼 만큼 물이 고인다. 수리업체를 불렀지만 업체는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허씨는 궁여지책으로 부엌 밑에 펌프를 설치해 집안에 물이 고일 때마다 하수도로 빼주고 있다. 그럼에도 바닥에서 나오는 습기는 빠지지 않아 벽 곳곳은 먹물이 흘러내린 듯 곰팡이로 거뭇하게 물들었다. 허씨는 무엇보다도 한겨울이 버티기 제일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보일러를 틀면 순식간에 물이 불어나 현관문을 열기가 버거워질 정도”라며 “전기장판에 의존하는데 인간의 존엄성이란게 없어지죠”라고 했다.
허씨는 금전적인 문제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허씨는 “경매로 낙찰 받고 수리를 해야되는데 수리비 얼마가 들지도 모른다”고 했다. 허씨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안전이다. 허씨는 “콘크리트가 물을 오래 머금고 있다는 것은 되게 위험한 것”이라며 “지금은 철근이 버텨주고 있지만 지반이 위험하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고 했다.
어떤 피해자는 관리가 안돼 망가진 집을 두고 도망치듯 거처를 옮기기도 한다. 주택 수천개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화성 ‘빌라의 신’ 권모씨 일당의 피해자 손모씨(34) 이야기다. 손씨 집은 지난해 여름 천장에서 윗집 하수가 쏟아졌다. 신혼부부인 그는 화성시 병점동에 위치한 신축빌라에 1억5000만원 전세로 입주했는데, 권씨가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침수 관리는 오롯이 손씨 몫이 되었다.
16일 찾은 손씨의 자택에 들어가자마자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씨는 “심할 땐 여름에 남자화장실에 가면 나는 냄새가 났다”고 했다. 천장의 벽지를 뜯자 누렇게 변색된 석고보드 위로 곰팡이가 거뭇게 피어있었다. 타일로 된 거실 벽에는 갈색 물방울 자국이 바닥까지 이어졌다. 반년 넘게 이곳에서 거주한 그는 지난해 12월 어머니가 구해준 근처 전셋집으로 도망치듯 거처를 옮긴 상태다. 손씨는 “악취가 심하고 도저히 못살겠어서 대항력만 유지하기 위해 가구 몇개만 두고 나왔다”고 말했다.
허씨와 마찬가지로 선순위임차인인 손씨도 정부의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지자체의 지원도 없었다. 손씨는 “(전세사기)피해를 복구하려면 집을 수리해서 경매로 팔아야되는데 수리 비용도 2000만원이라 건들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금전적 문제로 자녀계획도 포기했다”고 했다. 손씨는 정책이 바뀌지 않으면 개인회생을 택할 생각이다.
임대인이 잠적하거나 구속돼 주택의 관리자가 부재한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허씨와 손씨처럼 누수·단전·단수 등 관리 부실로 열악한 주거 환경에 노출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20일부터 24일까지 서울 강서구청이 전세사기 피해자 355명을 대상으로 전수 실태조사를 한 결과 피해자의 상당수인 225명(70.3%)가 임대인 부재로 건물 유지보수 문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관리 부실의 피해를 호소하고 있지만, 정부는 피해주택의 관리 문제까지 도울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임시거처 제공 대상에 부합하지 않거나 경매를 기다리는 피해자들은 지자체와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해 부실한 집에서 거주해야 하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관리 부실 주택에 대한 지자체의 구제 노력이 부족하다며 지자체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수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은 “지자체가 지원할 의지가 없는 상황에서 집 하자 문제를 피해자들이 홀로 감당해야 한다”며 “기본적인 집으로서 기능할수 있도록 시설관리에 대한 지원이 마땅히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임재만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지자체가 관리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살려서 개입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야당은 지난달 27일 전세사기 피해를 입은 공동주택에 대해 지자체가 관리업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을 국회 국토교통위에서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여당인 국민의힘의 반대로 개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이에 전세사기 피해자 단체는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 후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방치된 주택의 관리 문제 개입 등을 촉구하기도 했다.
허씨는 “그새 밖에 물이 더 불은 것 같다”며 빨간색 드릴을 꺼내 능숙하게 펌프와 연결했다. 허씨의 주택에서는 밤 늦도록 펌프의 모터 소리가 울렸다.
김경민 기자 kim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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