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산업으로 본 첫 대통령…DJ, ‘한류’ 기반을 놓다
“일본 문화 막아 국내 1등 해봐야 세계 1등 못하면 소용없다”
게임지원센터·콘텐츠진흥원 설립, 문화산업 ‘인재 결집’ 계기
“21세기는 한국의 세기…문화가 한국인에 가장 적합하다”
“20세기엔 공업과 노동력이 국력이었다면, 21세기엔 지식과 문화가 중요하다. 문화산업이 국가 기간산업이 되어야 한다. 21세기는 한국의 세기다. 왜냐하면 문화는 한국인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1999년 3월22일 문화관광부의 대통령 보고회의를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은 국정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내다본 김 대통령 인식이 묻어난다. 김대중 정부에서 문화는 지적 활동을 넘어선 ‘콘텐츠 산업’으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김 대통령이 가장 많이 한 얘기 중 하나가 “영화 ‘쥬라기공원’ 한 편의 흥행수입이 8억5천만 달러다. 자동차 150만대를 수출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기에 문화관광부 문화산업국장을 지낸 유진룡씨(박근혜 정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냈다)의 얘기다.
“1994년에 문화체육부(문화관광부의 전신)에 문화산업국이 처음 생겼다. 그런데 이 부서에서 다루는 ‘문화산업’이란 게 가장 아날로그적인 출판 말고는 별로 없었다. 그 내용을 성공적으로 채운 게 김대중 정부 때다. 2000년 무렵은 세계적으로 문화콘텐츠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시기였다. 디지털 콘텐츠의 세상이 오는데 이걸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정책적으로는 굉장히 망연자실한 상황이었다. 1999년에 게임종합지원센터(한국게임산업진흥원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2009년 한국콘텐츠진흥원으로 통합된다)를, 2001년에 문화콘텐츠진흥원(한국콘텐츠진흥원의 전신)을 만든 게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정부가 콘텐츠 산업에 굉장히 관심이 많고 지원을 적극적으로 한다는 걸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두 번째는, 이들 기관을 통한 지원이 당시로선 공평하고 공정하게 이뤄졌다. 그걸 보면서 젊은이들이 문화산업에 관심을 갖고, 많은 매니아층 인재들이 몰리면서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기반이 됐다. 그 전까지 문화는 정부의 중요한 정책 과제나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 들어 문화는 비로소 정책의 주변부를 벗어났다.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문화 산업’을 강조하고 또 아주 많은 지원을 한 결과다.”
1998년 2월 취임과 함께 정부 조직개편을 하면서 문화체육부를 문화관광부로 이름 바꾼 것도 김 대통령이었다. 유진룡 전 장관은 “그때 공무원들은 ‘문화부’라는 명칭을 선호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직접 문화관광부로 정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왜 그랬는지 알 순 없지만, 아마도 문화와 관광 같은 소프트 산업을 육성하는 게 앞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이 반영된 게 아닐까 싶었다”고 말했다. 김대중 청와대에서 정책기획수석을 지낸 김성재씨(나중에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는 “디제이(DJ)가 직접 문화관광부라는 작명을 한 건 맞다. 관광산업이 커져야 하는데, 그 중심이 자연이 아니라 문화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지었다”고 말했다.
1999년 3월22일 문화관광부 보고회의에 관한 국정노트 내용은, 대통령이 회의를 어떻게 이끌고 어떤 얘기를 하는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문화관광부 99.3.22(토의)1. 문화관광 통한 한국 이미지 개선 위해 어떠한 종목을 택하고 있는가? 지금까지의 성과는? 세계인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해외문화홍보원장)2. 밀레니엄 사업의 00과 추진상황은? 2000년 1월1일 평화 메시지는 세계 각국의 TV 수요가 폭주할 것인데 성과를 낼 수 있는가? (차관) 2000년 1월1일까지 285일. 99년 국정 5대 지표를 기억하는가?3. 문화관광 관련사업 확장과 일자리 확대 위해 금년에 969억 계상. 이의 효과적 사용 위한 대책은? (기획관리실장) 문화예술 44억원, 문화산업 500억, 관광 425억.4. 영상산업 활성화 위한 정부 예산과 민간자본 유치해야 하는데, 이의 전망은? ( 문화산업국장) 애니메이션을 OEM 중심에서 자체 제작으로 구조 발전시킬 방안은? - 98년 9,500만 불 중 OEM 8,000만 불 - 세계 3,500편 중 1,000여편(28.6%). 3위5. 지난해 12.10 고시한 인간문화재 00시의 방침은 어느 정도 진척돼 있는가? 00에 대한 00 지원보다는 경쟁력 있는 당국의 유통, 홍보 지원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대책은? 한국의 먹거리, 볼거리, 살거리, 놀거리의 거리 홍보는?6. 금강산 관광에서 5월부터 외국인 관광객 가능하게 된 것 차질 없는가? 지난해 7월2일 업무보고시 말한 설악산, 경주, 부여, 청주 등 관광 개발의 추진상황은? (관광국장) (대통령 지시)1. 20세기는 공업과 노동력이 국력. 21세기는 지식과 문화가. 앨빈 토플러 ‘노동력보다 사고와 지식의 힘이 시장을 지배하는 New Economy의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2. 문화산업은 국가기간산업이 되어야 한다 구분 영화 애니메이션 비디오 게임 음반 출판 국내 2600억 3200억 3000억 5500억 4000억 2.5조 세계 79조 88조 43조 99조 45조 72조3. 문화 관광 실업대책에도 중요한 역할 5월 내 90만 일자리.4. 21세기는 한국의 세기. 문화는 한국인에 가장 적합.5. 관광객 수. 98년 425만, 37억 불 흑자(58 : 21)6. 98년 기준 관광객 유치 (세계 30위), 관광수입 (세계 20위)7. 외화 가득율 87.2%(평상시의 2.47배), 98년 58억 불 수입은 평균 000 165억 불 해당. - 관광객 1명 유치는 21인치 tv 9대 수출 해당. - 5명 유치는 1500cc 자동차 1대 수출 해당 8. 중국 관광객 유치에 치중해야. 일본인 관광객 48%, 중국인 6.4%. 관광인구 5~8천만 최대 시장. 대통령의 노력. 9. 금강산 관광의 중요성. 1. 인적 접촉 2. 북한의 개방 촉진 3. 통일 의식 4. 아시아관광 중심지화 10. 문화관광부의 사명 1. 세계 속의 한국 2. 국가기간산업이자 국위 선양의 중요 전선 3. 민간 평가 22개 부처 중 4위. 소속공무원 평가 11위. 부처 생산성 평가 15위.
‘토의’라는 항목은 김 대통령이 회의에서 문화관광부 차관과 관광국장, 문화산업국장, 해외문화홍보원장 등에게 직접 묻고 싶은 질문을 정리해 놓았다. 해외문화홍보원장에겐 ‘문화관광 통한 한국 이미지 개선 성과와 대책’을, 기획관리실장에겐 ‘문화관광은 일자리와 직결되는데 관련 예산을 어떻게 쓸 계획인지’ 묻고 있다. 애니메이션 상품을 주문자 상표부착(OEM)에서 자체 제작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안을 묻는 말도 눈에 띈다.
‘대통령 지시’라는 항목은 회의를 마무리하면서 김 대통령이 문화관광부 간부들에게 당부할 내용을 담고 있다. 눈여겨볼 건 문화를 보는 디제이의 시각이다. 문화를 지적 활동을 넘어 국가 기간산업으로 보면서, 문화산업이 한국에 매우 적합한 분야라는 점을 강조한다. 디제이는 ‘노동력보다 사고와 지식의 힘이 시장을 지배하는 뉴 이코노미 시대가 도래했다’는 앨빈 토플러의 언급을 인용했다. 이어 영화·애니메이션·비디오·게임·음반·출판 등 분야별로 한국과 세계 시장 규모를 비교하면서 우리 문화산업이 확장할 여지가 매우 크다는 점을 강조한다. 유진룡 전 장관은 “문화가 21세기 핵심 산업이라는 인식은 그 당시 문화판에선 조금 있었지만 다른 분야 특히 정치권에선 찾기 힘들 때였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인식, 그리고 이에 기반을 둔 콘텐츠산업 투자가 오늘날의 한류를 일으킨 기반이라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이유다.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인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결심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김 대통령은 “문화는 흘러야 한다. 그래야 발전한다”고 말했다. 1998년 10월 일본을 국빈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이른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에서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겠다는 뜻을 공식화했다. 공동선언을 발표한 바로 그 날, 김 대통령은 엔에이치케이(NHK) 방송과 인터뷰를 했다. 키시 토시로 서울지국장과 쿠니야 히로코 아나운서 등은 김 대통령에게 조금 걱정스러운 투로 이렇게 물었다. ‘대통령이 결단하신 일본 문화개방에 한국 여론은 반드시 찬성하고 있지 않은 거 같다. 중앙일보 여론조사를 보면 김 대통령의 대일 정책에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문제로 47%가 종군위안부 등 과거사 정리를 들었고, 문화 개방은 6%만이 지지했다. 국민 여론이 지지하지 않는 방향을 지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 정권에서 가능하지 않았던 일이 왜 김대중 정권에선 가능한 것인가?’
김 대통령 대답은 이랬다. “정부는 국민 여론을 존중해서 따라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국민을 설득도 해야 한다. 이는 일본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한국만을 위한 일도 아니다. 문화 개방은 양쪽을 위해서 필요하며, 문화 쇄국주의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에 한국이 문화 쇄국주의를 취해서 중국에서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날 우리나라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거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인 문화를 내 것으로 재창조할 수 있느냐이다. 우리는 중국 문화라는 압도적인 것을 받아들여 재창조한 저력이 있다. 일본 문화가 들어와서 자극을 받으면 결국 우리 문화가 더욱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점에 관해 소신을 갖고 국민에게 이야기하겠다.”
쿠니야 아나운서는 곧이어 ‘일본 문화에 폐쇄적인 건 한국 문화산업을 보호한다는 측면이 있었다. 앞으로 한국 문화산업의 보호·육성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라고 물었다. 그 무렵 대중문화 개방이 일본에 훨씬 유리하리라는 건 한·일 언론과 문화계의 공통된 예상이었다. 한국 출판만화 시장은 일본 만화를 베껴 내는 경우가 많았고, 애니메이션 제작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났다. 일본 영화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비디오로 암암리에 돌아다녔고, 제이 팝(J-pop)은 국내에 매니아층을 형성할 정도였다.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면 한국 문화시장이 일본 문화에 점령되고 문화산업은 큰 타격을 입으리라 여기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쿠니야 아나운서 질문에 김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과거에는 그런 것을 명분으로 개방을 반대했다. 과연 그렇게 해서 얼마나 성공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막아서 국내 1등 해봤자 세계에서 1등 하지 못하면 소용없다. 우리가 문화산업에서 발전하고 이기기 위해서도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 것도, 유럽 것도 받아들이는데 왜 일본 것만 받아들이면 안 되는가. 이런 자세를 가지고 당당하게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디제이가 예견했듯이, 일본 문화가 한국을 휩쓸 것이란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1998년 10월부터 단계적으로 이뤄진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오히려 일본 시장에서 한국 대중문화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한국의 대일 문화콘텐츠 수출액은 2005년 4900억원에서 2017년 1조9000억원, 2021년 2조4600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반면에 일본 문화콘텐츠의 대한국 수출액은 2005년 1050억원 규모에서 2017년 2300억원 정도로 늘어나는 데 그쳤다. (한국콘텐츠진흥원 통계)
2022년 1월4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한류 엔터테인먼트 수출액 확대 … 2021년 1.3조엔, 5년 만에 두배로 증가’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엔 20년 전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과 역할을 재조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한국의 전 세계 콘텐츠 수출액은 2021년 115억 달러(약 15조1700억원)로 5년 전보다 두배 늘었고 일본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 한국정부의 엔테테인먼트 산업 육성책이 성공을 거뒀다. 한국에서는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문화는 21세기의 기간산업이 된다’며 각 대학에 관련 학과를 정비하는 등 콘텐츠 산업 육성에 나섰다. 이런 장기적 관점에서의 인재 육성이 한류의 약진을 지탱하고 있다.”
영화배우 김명곤씨(노무현 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는 “지금 한류가 김대중 정부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문화산업 육성책 덕분임을 부인할 순 없다. 그때 진보적 문화예술인들도 일본 문화 개방에 거센 반대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디제이가 옳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언제부터, 어떤 생각으로 일본 대중문화를 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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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 대기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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