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어린이 납치’는 제노사이드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한 지 2년이 돼간다. 러시아의 무차별 도시 공격과 점령, 우크라이나의 완강한 저항과 탈환, 러시아군의 재정비와 공세, 우크라이나의 재반격이 이어지면서 전쟁은 벌써 1년 가까이 교착상태다. 무의미한 소모전에 애꿎은 인명 손실과 광범위한 인권침해만 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21세기 이후 무력충돌로는 전례가 없을 만큼 단기간에 사망자가 많다는 점에서도 충격적이다.
교착상태 길어지며 인명 손실과 인권침해만 늘어
2023년 12월13일 미국 매체들은 미국 의회 소식통을 인용해 “(11월 말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 지상군 전체의 87%와 전차의 3분의 2를 잃었다”고 보도했다. 기밀이 해제돼 미국 의회에 제출된 정보당국의 평가에 따르면, “러시아는 계약 및 징집 병력을 포함해 침공 전 지상군을 구성했던 병력 36만 명 중 31만5천 명을 전장에서 잃었”으며 “러시아가 지상군을 현대화하려는 지난 15년간의 노력이 급격히 후퇴”했다.
우크라이나 쪽 피해도 크다. 미국 정보당국은 우크라이나 정규군과 국가근위대(국민위병, 예비군)를 포함해 전투원 사망자가 약 7만 명, 부상자는 12만 명인 것으로 추산했다. 러시아군의 무차별 공격에 따른 민간인 사망자도 많다. 2023년 11월 유엔 우크라이나 인권감시단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전면적 공격을 개시한 이후, 어린이 560여 명을 포함해 최소 1만 명의 민간인이 숨졌다”고 밝혔다. 그 대다수는 주택과 병원, 학교, 사회기반시설 등 민간인 거주 지역에 대한 미사일 공격과 포격으로 발생했다.
인명 피해와 별개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인권침해 중 하나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어린이 납치다. 2023년 10월, ‘우크라이나 국제독립조사위원회’(IICIU)는 러시아가 무차별 공격과 고문, 강간 및 기타 성폭력, 어린이 납치 등의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추가 증거를 담은 보고서를 유엔 총회에 제출했다. 이 위원회는 전쟁이 터진 직후 유엔 인권이사회가 설립한 기구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인권침해와 국제인도법 위반을 조사한다. 위원회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을 러시아 영토로 강제이송한 사례를 확인하고, 이는 ‘불법 추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같은 달, 우크라이나 의회의 드미트로 루비네츠 인권국장은 “러시아가 납치한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을 강제로 ‘재교육’하는 캠프를 최소 70곳 운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곳에서 러시아제 칼라시니코프 돌격 소총 분해 방법, 러시아 노래 부르기, 군복무 준비 방법 등을 가르친다고 했다. 이런 캠프는 러시아 영토 내뿐 아니라 크림(크름)반도를 포함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지에도 여럿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루비네츠는 “(캠프에서) 군사훈련과 세뇌교육이 강제로 실시된다. 이는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에게서 ‘국민 정체성’을 박탈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선전) 교육”이라고 짚었다. 그는 또 러시아가 이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우크라이나 어린이 중에서 미래에 우크라이나 또는 다른 나라에 맞서 싸울 신세대 러시아 군인을 양성하기 위해서”라고 덧붙였다.
하루 평균 28명 강제로 끌고가거나 속임수로 꾀어
우크라이나 정부가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 이후 어린이 피해를 집계하는 데이터베이스 ‘전쟁의 아이들’(Children of war)을 보면, 2024년 1월11일까지 강제로 끌려갔거나 삶터가 바뀐 어린이가 1만9546명이나 된다. 하루 평균 28명이다. 실종 아동도 2260명이 넘는다. 이 중 부모나 보호자 곁으로 돌아온 아이는 388명뿐이다. 납치 또는 유괴된 어린이 대다수는 러시아군 점령지에서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보호자 또는 후견인이 없는 고아, 부모가 러시아군에 체포돼 혼자 남겨진 아이들이었다.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 부모들에게 자녀를 무료 학생 캠프에 보내라고 속인 경우도 많았다. 스포츠와 게임, 해변 체험 등 프로그램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러시아 언어와 역사를 가르치고 국가를 합창했다.
2023년 12월29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도둑맞은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이란 제목의 기사로 수많은 사례를 보도했다. 전쟁 직후인 2022년 봄, 러시아가 점령했던 마리우폴에서 끌려간 올렉산드르 라드추크(당시 11살)도 ‘도둑맞은 아이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엄마가 러시아군에 체포돼 90분간 심문받고 돌아온 뒤 러시아 사회복지 관리들에게 인계됐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20개월이 걸렸다. 한 살 터울 자매인 아나스타시아(13)와 크세니아(12)는 “그들이 우리에게 아파트를 주고, 난민 등록을 해주고, 돈도 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아나스타시아 모티차크(16)는 “그들이 물리적 힘으로는 이길 수 없으니 심리적으로 우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고 말했다.
앞서 2023년 3월, 국제형사재판소(ICC)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그가 직접 임명한 마리야 리보바벨로바 러시아연방아동권리감독관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혐의는 ‘전쟁범죄’, 구체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어린이 불법 추방’ 혐의였다. 국제형사재판소가 현직 국가 최고지도자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은 수단의 오마르 알바시르(2009),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2011)에 이어 푸틴이 세 번째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비난과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2024년 1월4일, 푸틴 대통령은 외국인과 무국적자에게 러시아 시민권을 신속히 부여하는 시민권 법령에 서명했다. 법령에 따르면, 미성년 어린이의 시민권 신청과 부여는 대통령의 결정이나 해당 어린이를 보호하는 기관의 요청에 따라 ‘신속히 이행’(패스트트랙)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유괴한 어린이들에게 불법적이고 일방적으로 자국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은 강제동화 정책으로 국제법 위반이자 어린이 권리의 심대한 침해라고 반발했다. 반면 러시아는 이 법령이 보호자가 없는 어린이들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는 불 보듯 명료하다.
유괴한 어린이들에게 강제동화 정책 펼쳐
국제사회는 전쟁 중 어린이 납치를 제노사이드(genocide·인종 집단 말살)에 해당하는 심각한 전쟁범죄로 규정한다. ‘제노사이드’라는 단어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폴란드계 유대인 변호사 라파엘 렘킨이 1944년 저서 <점령지 유럽의 추축국 통치>에서 처음 썼다. 인종·부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접두사 ‘제노스’(genos)와 살인을 의미하는 라틴어 접미사 ‘사이드’(cide)의 합성어다. 렘킨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가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최종해결’ 정책을 지칭하기 위해 신조어를 만들었다. 종전 뒤 1945년 11월부터 1년간 열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법정에서 제노사이드는 나치 전범을 기소하는 죄목으로 처음 적용됐다.
1948년 유엔 총회가 채택한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제노사이드협약, 1951년 발효)은 “국민, 인종, 민족, 종교 집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절멸시킬 목적으로 행해지는 폭력 행위”(제2조)를 제노사이드로 정의하고, 그 다섯 가지 유형을 명시했다. ①집단의 구성원에 대한 살해 ②집단의 구성원에 대한 중대한 육체적·정신적 위해 ③신체적 파괴를 초래할 목적의 열악한 생활환경 ④출생 방지를 위한 의도적 조치 ⑤집단 내 어린이를 다른 집단으로 강제이동 등이다. 특히 5항 ‘어린이 강제이동’은 1항 ‘살해’, 2항 ‘위해’와 마찬가지로 ‘의도’와 ‘목적’ 같은 전제 조건이 달리지 않았다. 그 자체로 제노사이드라는 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어린이 집단 유괴도 명백히 제노사이드에 해당하는 전쟁범죄다.
뉘른베르크 특별법정이 제노사이드를 단죄한 지 반세기가 지난 1999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처음으로 ‘어린이와 무력분쟁’을 정식 의제로 삼고 첫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전쟁시 어린이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6대 중대 위반 사항’을 꼽았는데, 여기에도 ‘어린이 납치’(Abduction of children)가 포함됐다. 다른 다섯 가지는 살해 및 불구화, 아동을 군인으로 모집하거나 동원, 학교·병원 공격, 강간 또는 성폭력, 인도적 접근 거부 등이다. ‘어린이 유괴’는 어린이의 일시적 또는 영구적인 불법추방, 강탈, 포획, 체포 또는 실종을 뜻한다.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UNICEF)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22년까지 전세계에서 최소 3만2500명의 어린이가 분쟁 당사국 또는 집단에 납치됐다. 그중 4분의 3이 남자아이였다. 납치 자체가 범죄이지만 아이들은 끌려가서도 살해, 신체 훼손, 성폭력, 무장단체 징병, 인질 동원 등 또 다른 범죄 피해를 겪었다.
인간 개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인은 언어와 핏줄, 소속집단, 신체적 특성, 삶의 경험, 가치관 등 다양하다. 여기에는 개인의 선택과 상관없이 타고나는 것도 있다. 혈연과 출생지, 성적지향 등이 그렇다. 최초의 시민권(국적)이 그렇게 자동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시민권을 비롯한 소속집단은 사후에 개인의 선택으로 바꿀 수 있다. 이중국적, 심지어 복수국적을 허용하는 나라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소속집단 선택이 온전한 자기 판단과 결정의 결과여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인권선언은 “누구도 어떤 결사에 소속될 것을 강요받지 아니한다”(제22조)고 명시했다.
어린이 납치에 ‘정체성 박탈’ 모두 전쟁범죄
이와 반대로, 특정 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권리인 ‘소속될 권리’도 인권 분야에서는 중요한 권리 중 하나다. 정치·경제적으로 취약한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게 ‘소속될 권리’는 특히 중요하다. 단지 국가가 없어 박해받는 소수민족, 또는 망국의 한 같은 개념을 생각하면 쉽다. 이때 소속집단은 그들의 안전과 복지,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줄 최후의 보루다. 그러므로 ‘소속될 권리’가 적용되는 집단은 당사자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공동체라야 한다. 소속될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도, 보장받지도 못하는 가장 취약한 소수자가 바로 어린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53년 한국전쟁 정전 이후 2022년까지 국외로 입양된 아동이 16만8천 명을 넘는다. 뼈아픈 경험이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선 어린이들이 제노사이드에 해당하는 전쟁범죄의 최대 희생양이 되고 있다.
조일준 <한겨레> 토요판 선임기자 iljun@hani.co.kr
*호모 미그란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현안들의 역사적 맥락과 관련 지식, 그에 얽힌 사람들 이야기를 4주에 한 차례씩 연재합니다. 호모 미그란스는 ‘더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하는 인간’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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