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연이 할리우드 시상식들 휩쓰는 원동력은?

아이즈 ize 이설(칼럼니스트) 2024. 1. 17.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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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이설(칼럼니스트)

스티븐 연, 사진출처=에미상 인스타그램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의 상인 프라임타임 에미상(Primetime Emmy Awards) 남우주연상을 받은 스티븐 연이 한국 관객과 처음 만난 건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를 통해서다. '옥자'는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영화였다. '설국열차'(2013)로 국제적인 연출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준 봉 감독이 이번엔 넷플릭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독특한 소재의 어드벤처 드라마를 만들었다. 주인공 산골 소녀 미자(안서현)가 가족처럼 키우고 있던 돼지 옥자를 '슈퍼 돼지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미국의 거대 기업에 빼앗긴 후, 되찾기 위해 모험을 펼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스티븐 연은 영화 도중 돌연 등장하는 동물보호단체(ALF)의 멤버 중 한 명이었다. 폴 다노, 릴리 콜린스 등 제법 낯익은 배우들 사이에 잠깐 나온 탓에 뇌리에 오래 남지는 않았다.

스티븐 연이 '옥자'에 캐스팅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을 것이다. 하나는 그의 출세작이나 다름없는 좀비 드라마 '워킹데드'(2010)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바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배우라는 친근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스티븐 연은 2018년 이창동 감독의 문제작 '버닝'을 통해 다시 한 번 '길∼게' 한국 관객과 만났다. '버닝'은 복잡한 영화다. 소설가를 꿈꾸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종수(유아인)가 우연히 어릴 적 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자유분방한 해미는 어느 날 고양이를 맡기고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와서 정체불명의 남자 벤을 종수에게 소개한다. 교포 같은 느낌의 벤은 뭔가 비밀이 가득해 보이고, 께름칙한 분위기가 풍긴다. 스티븐 연이 바로 벤을 연기했다. 그러나 벤의 기묘한 성격처럼 관객에게 쉽게 다가가기는 어려운 캐릭터였다. 예상대로 '버닝'의 흥행 성적은 부진했고  스티븐 연과 한국 관객의 두 번째 만남도 이내 잊혔다.

영화 '미나리' 스틸

하지만 만나게 될 운명은 결국 다시 만나나 보다. 아시다시피 스티븐 연은 2021년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로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정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미국에 이민 간 한국인인 제이콥 역을 맡아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1983년생인 스티븐 연은 서울에서 태어나 5세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자신도 미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로서, 아시아계 배우에 대한 선입견이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을 터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나무랄 데 없는 연기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부문 후보에 오르며 오랜 '벽'을 하나 넘었다.

'성난 사람들'(BEEF) 역시 스티븐 연의 태생적 배경과 정체성을 그대로 담고 있는 수작이다. 한국계 감독과 배우가 주축이 돼 만든 넷플릭스 10부작. 돈이 되는 것이라면 일을 가리지 않는 가난한 남자 대니(스티븐 연)와 이제는 정말 쉬고 싶은 부잣집 워킹맘 에이미(앨리 웡)가 운전 중에 서로 시비가 붙어 화를 주체하지 못하면서 펼쳐지는 블랙 코미디다. 중국-베트남계인 주연 여배우 앨리 웡을 제외하곤 출연하는 배우들이 거의 한국계다. 조셉 리, 영 마지노, 데이비드 최, 애슐리 박 등이 그렇다. 그리고 이 작품을 연출하고 제작한 것도 한국계 이성진 감독이다. 이 감독의 말처럼 "만약 5∼10년 전이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 작품"인 셈이다.

한국계 이민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한국계가 만든, 어찌 보면 미국 주류 사회에선 '변방'으로 치부될 수 있는 드라마가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매혹시킨 것은 작품 속에 담긴 주제가 지극히 보편적이고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로드 레이지'(Road Rage·난폭 운전)는 그동안 종종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 다뤄졌던 사회 문제다. 운전 중 사소한 것으로 시비가 붙어 위험천만한 적대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대니가 한국계 이민자라는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지만 로드 레이지로 인한 분노의 폭발에는 색깔을 따질 수가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운전 중에 위협을 당한다면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을 테니까.

'성난 사람들', 사진=넷플릭스

피부색은 구별되지만, 대니나 에이미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란 점에서 오히려 익숙하다. 그들이 한국계이고 아시아계여서 특별하거나, 다른 게 아니라 보편적인 현대인으로서 삶의 희로애락을 똑같이 지니고 있다. 부모가 운영하던 모텔은 망하고, 자신의 일은 자꾸만 꼬여가는 불쌍한 인생은 어디에나 있고, 반대로 많은 것을 가졌어도 가슴속 한구석이 채워지지 않는 부자도 얼마든지 있다. 한국계라는 외피만 입었을 뿐 등장인물들이 로드 레이지로 분노를 표출하고 대립하는 심리는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스티븐 연은 이런 보편적 감정을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 극중 역할이자 실제 자신의 모습인 한국인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지질한 인생을 사는 대니의 심리를 설득력 있게 풀어내며 에미상을 거머쥐었다. 수상 후 스티븐 연은 "솔직히 대니로 살아가기 힘든 날이 있었다. 멋대로 판단하고 조롱하고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런데 앤드류 쿠퍼(포토그래퍼)가 내게 '대니를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줬다"면서 "대니에게 감사하고 싶다. 편견과 수치심은 아주 외로운 것이지만, 연민과 은혜는 우리를 하나로 모이게 만든다. 이걸 대니가 가르쳐줬다"고 말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장점을 살리고 있지만, 스티븐 연이 아시아계 배우가 맡는 전형적인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앞서 밝혔듯이 그의 출세작은 '워킹데드'였고, 이후 장르와 캐릭터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도전을 해왔다.

특히 조던 필 감독의 '놉'(2022)에서의 연기는 매우 탁월해 보인다. '놉'은 필 감독이 '겟 아웃'과 '어스'에 이어 내놓은 또 하나의 SF 미스터리물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농장을 운영하던 헤이우드 가족에게 닥친 기이한 일들을 다루고 있다. 스티븐 연은 농장 인근에서 관광객을 위한 이벤트 쇼를 하는 주프를 연기했다. 역시 인물 배경에 아시아계라는 특징이 부여돼 있으나 그보다는 훨씬 미스터리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를 보여줬다. 스티븐 연은 올 상반기 개봉 예정인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 17'에도 출연한다. 이번엔 또 어떤 인물로 돌아올지 무척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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