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식재료 · 창의적 음식 개발… 요리의 세계 확장한 실험자[살아있는 과학]
재료·조리과정 분자단위 분석
특정한 맛 배가되는 이유 밝혀
얼음 결정화 억제·결빙시간↓
부드러운 질소아이스크림 탄생
분자 요리는 과학 발달사에서 분자 생물학의 탄생과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요리업계의 새로운 실험이자 도전이다. 눈에 보이는 세포 레벨의 관찰과 기전(機傳) 규명으로 만족하던 전통 생물학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 및 원자 수준까지 더 세밀하고 깊게 들어간 다음, 이를 데이터 분석 이론과 결합시킨 분자 생물학은 우리가 생명의 신비를 이해하는 깊이를 더했다. 마찬가지로 요리의 식재료와 조리 과정을 분자 단위까지 과학적으로 분석하면서 더 맛있는 요리, 새로운 조리 방법을 찾던 분자 요리사들의 실험 정신은 21세기에 ‘모던 퀴진(modern cousine, 현대 요리)’으로 가는 새로운 맛의 루트를 개척해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분자 요리의 인기가 조금 뜸해진 데는 기초 과학과 응용 과학의 경계 나누기라는 미묘한 갈등이 잠재돼 있다. 분자 요리를 창안했던 선구자들은 분자 요리를 진지하게 파고들어 맛있는 음식보다 재료와 조리의 과학적 메커니즘 발견에 더 집착했다. 이들은 분자 요리가 과학 지식을 요리에 응용하는 게 아니라, 부엌에서 과학 지식을 생산하는 발견이라고 강조했다. 새로운 식재료와 조리 도구, 요리법 등을 통해 참신한 맛을 선보이는 기술과는 다른, 순수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분자 요리로 레스토랑을 열었던 페란 아드리아 등 인기 있는 분자요리 셰프 집단이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과학(science)과 기술(technology), 기초 과학과 응용 과학 사이에서 반복되는 논쟁의 하나다. 자연의 존재 양식과 운용 법칙을 순수하게 탐구하는 과학과 그 지식을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 등에 적용해 현실로 활용하는 기술은 처음에는 서로 다른 지식체계라고 여기며 각자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이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파급력이 커질수록 둘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한 몸으로 합쳐졌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법칙이 새로운 기술을 낳았을 뿐 아니라, 거꾸로 기술의 진보가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유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의료 분야에서 18세기 레벤후크의 현미경, 20세기 자기공명영상장치(MRI)와 컴퓨터단층촬영(CT)의 발명이 기초 의과학을 얼마나 발전시켰는지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분자 요리도 마찬가지다. 분자 요리를 진지한 과학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과학자의 탐구심과 이를 새로운 음식의 발명이라는 기술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요리사의 미식 철학은 결국 하나로 합쳐질 수밖에 없다. 과학과 기술이 서로의 고유한 영역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발견과 발명을 공유할 때 인류 전체의 복지 수준은 크게 향상돼왔다.
굳이 나누자면 분자 조리학은 식재료가 조리와 요리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식재료의 성질과 그 변화, 특정한 맛이 배가되는 요인 등을 분석하는 과학이다. 기초연구로서 거시에서 미시를 이끌어내는 환원주의적 접근법을 고수한다. 반면, 분자 조리법은 맛있는 식재료와 새로운 요리 방법, 결과적으로 창의적 요리를 개발하는 기술이라 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은 서로 자극을 주고받으며 상호 발전한다. 분자 조리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맛있는 새 요리가 탄생하는 분자 조리법이 나온다. 또 분자 조리법이 만든 새 요리의 분자 특성을 분석해 왜 그런 맛이 나는지를 분자 조리학이 밝힌다. 이처럼 미시에서 거시, 다시 거시에서 미시로 연결되는 선순환이 요리의 발전을 이끈다. 좋은 예는 새로운 맛을 선보이며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질소 아이스크림이다. 우리가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기대하는 맛은 혀끝에서 살살 녹는 부드러움이다. 특히, 유지방이 풍부하고 진한 고급 아이스크림일수록 혀에서 바로 미끄러지는 듯한 감촉을 느낄 수 있다. 이때 아이스크림을 현미경으로 가져와 들여다보면 얼음의 결정이 매우 작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이스크림 맛은 아이스크림 조직 속 얼음 결정의 크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얼음 결정의 크기가 35㎛ 미만이면 매우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35∼55㎛이면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55㎛ 이상이면 거친 맛의 아이스크림으로 판정됐다. 이를 곧장 분자 조리법의 실용적 기술 정신으로 연결하면 새로운 제품이 탄생한다. 분자 조리학 덕분에 아이스크림 속 얼음 결정이 작을수록 질감이 더 부드러워진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진짜 문제는 결정을 작게 만드는 현실의 기술이다. 얼음의 결정화(結晶化)를 억제하는 동시에 결빙 시간도 단축할 수 있을까? 어는 속도를 빨리 만들고 싶다면 액체 질소를 사용하면 된다. 영하 196도의 액체 질소로 아이스크림 재료인 우유나 생크림을 순식간에 얼리면 혀끝에 살살 녹는 아주 부드러운 질감의 아이스크림으로 형성된다. 분자 조리학으로 알게 된 사실을 분자 조리법으로 응용해 ‘질소 아이스크림’으로 불리는 새로운 디저트의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새롭고 창의적인 발견과 발명에는 어떤 분야든 편견과 오해, 반발의 높은 장벽이 가로막고 서 있는 일이 잦다. 분자 요리는 보수적이고 잘 변하지 않는 대중의 까다로운 입맛에 도전해 참신한 성공의 기록을 남겼다. 분자 요리는 전통 요리의 파괴자가 아니라 요리의 세계를 더 넓고 깊게 확장한 실험자요, 도전자였다. 맛의 유행은 지나가도 음식과 요리를 과학적 사고방식과 도구로 분석하고, 다시 부엌에서 이를 활용해 전혀 다른 결과물로 조리해내던 분자 요리의 정신만은 뚜렷이 살아있다.
노성열 기자 nosr@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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