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문장으로 베어낸 시간의 단면들…'사라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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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설가 앤드루 포터의 신작 단편집 '사라진 것들'(문학동네)은 상실과 추억, 그리고 회한에 관한 이야기다.
찬란히 빛나던 시간이 모두 지나간 뒤 남겨진 것들, 인생이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 부지불식간에 눈을 떠보니 낯선 곳에 이르렀다는 생경한 감각. 수록된 모든 작품의 주인공은 인간이 흐름을 거역할 수 없는 시간 그 자체인 것 같다.
그렇게 엮어낸 문장들은 마치 연필로 오랜 시간 천천히 눌러 쓴 것처럼 촘촘하고 단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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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미국의 소설가 앤드루 포터의 신작 단편집 '사라진 것들'(문학동네)은 상실과 추억, 그리고 회한에 관한 이야기다.
찬란히 빛나던 시간이 모두 지나간 뒤 남겨진 것들, 인생이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 부지불식간에 눈을 떠보니 낯선 곳에 이르렀다는 생경한 감각…. 수록된 모든 작품의 주인공은 인간이 흐름을 거역할 수 없는 시간 그 자체인 것 같다.
무소불위의 시간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며 인간을 소외시키기도 하고,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라고 다그치며 진실에의 대면을 요구하기도 한다.
표제작은 화자인 '나'와 절친했던 한 친구의 실종 소식으로 시작된다.
광대한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에서 트레킹을 하다 실종된 친구 대니얼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망연자실한다.
이들은 대니얼의 죽음을 직감하고서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하거나 헛된 희망을 품고, '나'는 대니얼의 프랑스인 여자친구인 앙투아네트와 함께 유품들을 정리하며 지난 시간을 천천히 떠올린다.
"7번가에 있던 우리의 옛 아파트로, 혹은 나중에 바턴스프링스에서 살던 아파트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물론 그때는 오스틴이 변하기 전, 그저 한산한 대학 도시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내 나이 사람들은 그 시절을, 1990년대 초반의 오스틴을 향수에 젖어 떠올리기를 좋아한다. 마치 1920년대의 파리나 1960년대의 버클리를 얘기할 때처럼."(단편 '사라진 것들'에서)
추억이라 명명된 과거의 아름다웠던 한때는 시간의 불가역성을 확인시켜주는 장치일 뿐이다. 추억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진실로 인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지 모른다. 실종된 대니얼이 '나'에겐 돌아갈 수 없는 젊음을 표상하기에 더 사무치도록 그리운 것처럼.
또 다른 단편 '담배'의 테마도 시간의 유한함이다.
불을 붙이고 나서 불과 몇 분이면 사그라지고 마는 담뱃불처럼, 젊음의 달콤했던 자유와 그 이후 이어지는 기나긴 책임의 시간까지도 모두 짧고도 유한한 삶의 일부일 뿐이다.
"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 그런 우리가 영원할 순 없다는 것을, 첫 아이가 태어나면 담배가 영원히 사라지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와인과 심야의 여유도 사라진다는 것을. 이제 우리가 함께하는 인생은 더욱 풍부해지고, 사랑과 선의는 두 배가 되고, 집안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줄어들겠지." (단편 '담배'에서)
책의 제목처럼 이 소설집에는 사라지는 많은 것이 등장한다. 그것은 촉망받던 연주자가 희귀병으로 잃어버린 재능이기도 하고, 빛나는 청춘을 함께 했던 친구들과 꿈꾸던 미래이기도 하며, 한 부부 사이에 잠시 머물렀다가 둘의 관계를 영영 바꿔버리고 떠난 한 소녀이기도 하다.
작가는 단편마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한 지점을 예리하게 베어내 정갈하고도 우아한 문장으로 다듬어 보여준다. 그렇게 엮어낸 문장들은 마치 연필로 오랜 시간 천천히 눌러 쓴 것처럼 촘촘하고 단단하다.
이 작품은 조금씩 더디게 소설을 발표하고 있는 과작(寡作)의 작가가 자신에게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안겨준 첫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이후 15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소설집이다. 단편 중간중간에 길이가 매우 짧은 단편인 엽편(혹은 초단편) 6편을 삽입해 총 15편의 소설을 수록했다.
시간이라는 까다로운 재료로 일급 셰프가 만들어낸 소박하고도 내실 있는 정찬 같은 소설집이다.
문학동네. 민은영 옮김. 332쪽.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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