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스스로 민족의 반역자임을 선언하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4. 1. 1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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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지오그래픽]

● 대남정책 근본적 방향 전환
● 독재체제 수호 위한 절박감
● 분단史 처음으로 민족 부정
● 대한민국은 무력 통일 대상

2023년 12월 26~30일 열린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8기 제9차 전원회의. [뉴시스]
북한은 2023년 12월 26~3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 확대회의를 개최했다. 이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는 2023년을 "조국청사에 불멸할 영웅적 연륜"이라고 규정하고, 사회주의 건설과 국력 강화의 '경이적인 승리'가 이룩됐다는 평가를 내렸다. 2022년 12월 개최된 제6차 전원회의 확대회의 때 당시 국면을 "전대미문의 온갖 도전과 위협들이 가득했던 2022년"으로 규정했던 점에 비춰 북한이 1년 사이에 상반된 평가를 내린 것이다.

김정은은 알곡 생산목표의 초과 수행이 "가장 귀중하고 값비싼 성과"라고 강조했지만 알곡 생산은 전년의 103%였으며, 쌀의 경우 2021년과 비교해 오히려 5만t이 감소했다. 추수 이후 하향세를 보이던 북한의 쌀과 옥수수 가격은 최근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2023년 8월 말 국경 개방으로 회복세에 있는 북·중 교역은 2023년 1~11월 총 20억 달러로 전성기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교역액 중 수입이 18억 달러로 무역적자가 빠르게 누적되고 있다. 전원회의 직후 새해맞이 경축대축전을 열고 2023년을 위대한 전환의 해, 승리의 해로 규정한 북한 경제의 실상이다.

두 국가 관계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은 국방력 강화를 기반으로 하는 강 대 강, 정면 승부의 '대미 대적 투쟁원칙'을 대외정책 기조로 내세웠다. 김정은은 '미국과 추종세력들의 반공화국대결책동'으로 한반도 정세가 '핵전쟁접경'에 이르렀다며, 한미 및 한미일 협력 강화 동향을 일일이 거론했다. 김정은은 "전쟁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현실적인 실체로 다가왔다"며, 인민군·군수공업부문·핵무기부문·민방위부문의 전쟁 준비 완성을 가속화하기 위한 과업을 제시했다.

그는 "반제자주적인 나라들과의 전략적 협조관계를 확대·발전시키고 국제적 규모에서 반제공동행동, 공동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과업도 제시했다. 반미·반서방 국가와 연대를 강화해 북한판 신냉전전략을 구사하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주목되는 부분은 남북관계를 비중 있게 다루고, 대남 부문에서 근본적인 방향 전환 노선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김정은은 자신들의 통일노선인 고려연방제와 상반되는 흡수통일, 체제통일을 국책으로 정한 '대한민국 것들'과는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며, 남북관계를 더욱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동족이라는 수사적 표현 때문에 "미국의 식민지 졸개에 불과한 괴이한 족속들과 통일 문제를 논한다는 것"이 국격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김정은은 특히 "현재 조선반도에 가장 적대적인 두 국가가 병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며 남북관계가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규정했다. 또한 김정은은 남측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로 여기는 것은 "범하지 말아야 할 착오"라고 단정했다. 그는 노동당 통일전선부를 비롯한 대남사업 부문의 기구들을 정리·개편하고, 근본적으로 투쟁 원칙과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원회의 직후 최선희 외무상은 즉각 김정은 지시 이행을 위해 남북관계 기구를 정리하는 협의에 나섰다.

이번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 단절을 선언한 북한의 태도는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인 2022년 7월 27일 정전협정기념일 연설에서 김정은은 윤석열 정부에 대해 "역대 그 어느 보수정권도 능가하는 극악무도한 동족대결"을 시도한다고 비난했다. 같은 해 8월 18일 김여정 부부장은 담화를 통해 윤석열 대통령을 비난하며 서로 의식하지 말고 살자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북한은 남북관계의 어떤 제의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대남강경책으로 일관했다. 북한은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부터 남북관계에서 헤어질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정권의 원래 계획은 핵무기를 보유한 상황에서 남북 및 북·미 관계 개선을 통해 자신들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 정권은 출범 이후 2017년 말까지 남북 및 북·미 관계, 그리고 그 어떤 대외관계도 없이 핵무기 개발에 주력했다. 북한이 실시한 총 6회의 핵실험 중 4회가 김정은 정권에 집중돼 있으며, 중장거리탄도미사일 발사가 본격화한 것도 김정은 정권기다. 김정은은 2017년 9월 6차 핵실험에 이어 11월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이후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고 2018년 신년사를 통해 남북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등 한반도 정상외교를 본격화했다.

핵무기 보유를 기반으로 남북 및 북·미 관계 개선을 통해 북한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관철하려던 김정은의 의도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로 실패로 돌아갔다. 바이든 정부 출범과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도 북한에 유리한 국면은 조성되지 않았으며,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북한 경제의 위기는 가속화했다.

자기모순의 혼란스러운 어법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 왼쪽은 딸 김주애. [뉴시스]
북한의 헤어질 결심은 윤석열 정부와는 자신들이 우위에 서는 남북관계 형성이 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남북관계 발전'을 지향하던 문재인 정부와 달리 윤석열 정부는 '남북관계 정상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잘못된 관행의 시정에 주력해 왔기 때문이다. 또한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한반도 전역을 영토로 규정한 헌법 3조와 자유민주주주의 기본 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4조를 강조하고 있다.

김정은 정권이 원하는 것은 북한이 갑이 되는 일방적 남북관계, 평양이 잘못을 해도 보상이 주어지는 관계다. 남북관계 전성기였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북한 경제는 상대적 안정기를 구가했으며, 식량 위기도 피해갈 수 있었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 시기 기대하던 성과를 도출하지 못했으며, 윤석열 정부의 원칙적 대북·통일정책 기조로 인해 자신들이 원하는 남북관계 형성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남북관계의 헤어질 결심을 공식 선언한 배경이다.

2023년 7월 김여정 부부장이 기존의 '남조선' 대신 '대한민국' 표현을 사용한 이후 북한 매체와 주요 당국자가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총비서도 동일한 표현을 사용했다. 북한의 대한민국 표현 사용은 이번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이 언급한 '적대적인 두 국가 병존' '전쟁 중 두 교전국 관계 고착'과 함께 북한이 두 개의 국가론(Two Korea)으로 전환한 것이 아니냐는 평가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노동당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이 규정한 남북관계의 근본적 전환 선언은 노동당의 규약 및 북한 체제의 정체성과 심각한 논리적 모순을 야기한다. 북한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할 노동당 규약과 헌법에는 '주체혁명위업'과 '주체혁명전통'이 명시돼 있으며, 김정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혁명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에서 주체혁명은 한반도의 통일을 의미한다. 김정은이 '항일무장투쟁' '백두혈통' '조국해방전쟁' 담론 등을 통해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한반도 통일은 정치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명분에 해당한다. 북한은 이미 남북 체제경쟁에서 실패했으며, 자력으로 통일을 실현하기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즉 두 개의 별개 국가로 전환해 독재체제 유지와 체제 안정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최근 북한이 대한민국 표현을 사용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금기의 표현인 '한반도 두 개의 국가'론을 언급한 배경이다. 실현 불가능한 통일을 포기하고 독재체제 유지에 전력하겠다는 것이 김정은의 속내일 개연성이 있다. 일각에서 다가오는 제9차 노동당대회에서 두 개의 국가론을 채택할 가능성도 점치고 있으나 김정은 정권의 의도와 관계없이 '한반도 두 개의 국가론'은 북한체제 특성상 역린에 해당한다.

그동안 북한은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겹화살괄호(《 》)'를 이용해 강조의 의미를 부각했으며 '역도' '괴뢰지역' '조국통일' 등의 용어를 병행해 한국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은 노동당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남반부' '남조선' '전 영토의 평정'을 강조했다. 남반부와 남조선은 북한이 중심이 되는 한반도의 이남이며, 영토의 평정은 통일을 의미한다. 1990년대 수십만 명 이상이 아사한 이른바 고난의 행군기를 비롯해 구조적 경제위기를 주민들이 인내해야 하는 이유를 북한 당국은 통일의 필요성으로 설명해 왔다. 김정은 정권이 통일을 포기하고 두 개의 국가로 전환한다는 점을 공식화할 경우 스스로 정권의 뿌리를 부정하는 셈이며, 그동안 인내해 온 주민들의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이 대한민국을 통일의 상대가 아니라고 규정한 것은 자기모순의 혼란스러운 어법일 뿐이다.

반민족적 평화통일 포기 선언

이번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의 언급을 두 개의 국가론, 또는 통일 포기론으로 보기는 이르다. 평화통일의 포기이며, 대한민국을 무력 점령의 대상으로 더욱 명확하게 규정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북한은 그동안 대한민국을 통일전선전술을 통한 통일 대상으로 인식하고, 미국을 주적으로 설정했다. 체제 경쟁의 실패로 최대 위협은 미국이 아닌 대한민국으로 변화한 것이 현실이다. 북한이 반동사상문화배격법, 군중신고법, 평양문화어보호법, 청년교양보장법 등 한국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해 온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의 남북관계 단절 선언의 숨은 그림은 체제수호와 독재체제 유지를 위한 절박감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김정은이 한반도 평화통일을 부정하고 핵무기를 활용한 한국 점령 의도를 공식화했으며, 남북이 같은 민족이라는 점을 부정했다는 점이다. 분단사에서 남북의 어떤 지도자도 한민족의 동질성과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부정한 사례가 없다.

김정은은 최초로 한민족의 정체성과 평화통일의 정당성을 부정했으며 그 이유는 3대 세습 독재정권과 실패한 북한체제의 유지가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 정권 스스로 민족 반역자임을 선언한 셈이다. 대한민국은 여야, 진보와 보수의 차이를 초월해 민족의 염원과 사명을 부정한 김정은 정권에 준엄한 질책과 경고를 보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침묵의 시간이 아니다.

신동아 2월호 표지.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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