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일 다른 처우…이상하다고 느낀 게 바로 이거였구나

한겨레 2024. 1. 17.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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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비정규 노동수기 공모전 대상
2017년 당시 ​한국지엠 창원공장은 조립부서 IP서브직(차량 대쉬보드를 조립하는 공정) 노동자들 구조조정을 발표했다. 이에 항의하는 한국지엠 창원비정규직지회 파업으로 조업이 중단된 공장 내부 모습. 필자 제공

자동차 공장에 입사하다

고등학교 때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로 인해 취업이 무척 어려웠다. 졸업 뒤 20대 중반까지 여러 현장에서 전기공으로 일했다.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열처리장비 설치 공사가 창원으로 내려오기 전 마지막 일이었다. 처음으로 접한 자동차 공장이자 대공장이었다. 공장 지붕에서 바라본 전경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너무 넓어 셔틀버스가 다녔고, 퇴근시간이면 ‘쏟아져 나온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많은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이후 경남 창원으로 내려와 구직할 때 그런 대공장에서 일해 보고픈 마음이 생겼다. 마침 생활정보지 ‘교차로’에 전자공장과 자동차공장 하청업체 구인이 있었다. 그렇게 2008년 2월 지엠대우자동차 창원공장에 입사했다. 2018년 1월 해고되기 전까지 10년을 일했다.

반복된 입사와 퇴사

자동차 공장에는 프레스부, 차체부, 색을 입히는 도장부, 엔진부, 가공부, (수출용 자동차를 가조립 상태로 포장하는) KD부, 조립부 등 많은 공정을 통해 한대의 자동차가 완성된다. 처음 입사한 곳은 조립부서 도어조립반이었다. 이후 차체부로 옮겨 보닛, 도어, 트렁크 등을 차에 조립했다.

하청업체는 3개월 계약직부터 시작했다. 이후 3개월씩 계약을 연장해주었다. 하지만 계약연장은 세번까지였다. 아무리 일하고 싶어도 연속 9개월 이상 일할 수 없었다. 관리자는 개인사정으로 사직한다는 사직서를 쓰고 쉬고 있으면 연락을 준다고 했다. 집에서 기다리다 보면 하루, 이틀, 일주일 혹은 한 달이 금세 지나갔다. 어떤 날은 관리자가 오전에 전화해서 야간조(당시는 12시간 주야 2교대로 일했다. 요즘은 주간 2교대로 바뀌었다.)로 오늘 바로 출근할 수 있는지 물어왔다.

공정과 노동자는 바뀌지 않아도 업체명과 업체사장은 여러번 바뀌었다. 나는 별다른 상관없이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며 일만 했다. 하청업체 관리자는 면접 때마다 ‘열심히만 하면 도급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도급은 하청업체 정규직을 말한다. 처음에는 도급이라는 단어가 귀에 닿지 않았다. 말이 정규직이지 한마디로 무기계약직이다.

하청업체에서 1년 이상 근무하면 한국지엠 정규직 채용 때 이력서를 제출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하청업체에서 9개월 이상 계약해주지 않기 때문에 1년 이상 근무하려면 도급이 되어야 했다. 관리자는 나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본인만 열심히 하면 도급으로 전환시켜준다’며 묘한 경쟁심을 불러일으켰다.

계약직으로 일하는 동안 경조사와 집안 제사에 가지 못했다. 한달에 하루도 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도급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힘들어도 참고 일할 수밖에 없었다. 계약직들은 잔업이나 특근이 생겼을 때 군소리하지 않고 일했다. 하청업체 관리자는 도급으로 전환해줄 수 있는 신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헛된 희망이었다. 한국지엠이 정규직을 언제 채용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실제 내가 입사하고 정규직 채용은 단 두번뿐이었다. 하청업체는 비용이 많이 드는 도급 인원규모(TO)를 정해놓았다. 기존의 도급이 정규직이 되어야 계약직이 도급이 되었다. 도급이 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웠고, 정규직이 되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려웠다.

​2017년 한국지엠 창원비정규직지회 파업투쟁 당시 현장 모습. 필자 제공

노동조합을 마주하다

한국지엠 창원공장에는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한국지엠 창원비정규직지회가 있었다. 5년 동안 9개월짜리 계약직으로 전전긍긍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다. 내가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즈음 노동조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05년 800여명에 가까운 비정규직들이 노동조합으로 뭉쳐 투쟁했다고 한다. 물대포까지 앞세운 무자비한 공격에 맞서 고공농성까지 했단다. 안타깝게도 2006년 선별복직을 받아들이면서 투쟁은 끝이 났다. 이후 현장에서 노동조합의 존재는 사라졌다.

투쟁을 경험했던 노동자들은 이전 투쟁의 패배감에 두려워했고 투쟁을 경험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2010년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가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창원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다시 꿈틀하기 시작했다. 2013년 노동조합이 다시 움직였다.

비정규직지회가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설명회를 진행한다고 했다. 소송으로 정규직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해 설명회에 참석했다. 설명회에서 자동차 완성공장에 하청업체 파견은 불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상하다고 느낀 게 바로 이거구나.’ 안정적인 일자리인 정규직으로 가는 길을 위해 소송에 참여하면서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2016년 여름의 일이다.

되돌아보는 부당한 사건들

이후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착취당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처음 입사한 업체에서는 목장갑을 하루에 한 켤레만 주었다. 장갑에 구멍이 생겨도, 온갖 기름에 손이 젖어도 바꿔주지 않았다. 어느 공정에서는 목장갑이 잘 찢어졌다. 그만큼 살도 잘 찢어졌다. 업체가 바뀌어도 처우는 다르지 않았다.

야간조 근무 때 하루는 팔꿈치가 찢어져 다섯 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지정병원 응급실에서 꿰맨 뒤 집이 아니라 회사로 복귀했다. 관리자는 괜찮은지 물어보더니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바로 라인으로 투입했다. 당시 산재나 공상 처리 같은 말은 알지도, 듣지도 못했다.

두시간마다 10분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그때 화장실을 가거나 담배를 피운다. 컨베이어벨트에 붙어 일하는 동안에는 화장실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한다. 사람인지라 때로는 일하는 중간에 화장실이 급할 때가 생긴다. 참을 수 없어 급하게 관리자를 부르면 ‘쉬는 시간에 뭐했냐’는 비난과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인간으로서 모멸감을 느끼곤 했다. 월차를 쓰기 위해서도 많은 이유가 필요했다. 월차를 쓰는 것은 성실하지 못한 것이며 도급이 되는 기회를 스스로 날리는 행위였다. 일할 때마다 사람이 아니라 마치 컨베이어벨트에 붙어 있는 로봇 같았다.

업체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계약직으로 운영하면서 퇴직금이나 휴가비, 성과금 등으로 이윤을 남겼고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고용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비정규직지회에서 매년 하청업체와 교섭을 진행했지만 하청업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 스스로 아무렇지 않게 ‘한국지엠이 해주지 않으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불법파견’을 저질렀다는 말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래도 노동조합을 하면서 월차와 화장실 이용 등 아주 소소하지만 절실한 것부터 현장이 바뀌기 시작했다.

2023년 9월20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한국지엠 창원공장 해고 노동자들이 불법파견 늑장판결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노동자들이 낸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은 1, 2심에서 승소했지만, 2020년 상고된 뒤 대법원은 4년 넘도록 결론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필자 제공

민중총궐기 날 날아든 해고문자

2016년 겨울, 비정규직 노동자가 무엇인지 알아가던 즈음 박근혜퇴진 민중총궐기에 전체 조합원이 참여했다. 서울에서 창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해고예고 문자가 전체 조합원에게 날아들었다. ‘업체 폐업’이라는 강수를 던진 것이다. 업체가 바뀌어도 노동자들을 새로운 업체가 승계하기 때문에 해고예고장은 보내지 않는다. 해고예고장은 노동조합을 깨기 위함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전체 조합원과 함께 파업투쟁이 시작되었다.

창원시민들에게 선전물을 나눠주며 우리 상황을 알렸다. 서울에서도 집회가 있을 때마다 선전물과 발언으로 우리의 투쟁을, 한국지엠의 만행을 밖으로 알렸다. 전체 조합원이 공장 밖으로 쫓겨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12월31일 저녁, 하나둘씩 가방과 침낭을 메고 한명도 빠짐없이 조합원들이 공장식당에 집결했다. 실랑이 끝에 결국 한국지엠은 고용을 승계하겠다는 말을 전해왔다. 간부 5명이 징계를 받았지만 조합원 전체 고용을 보장받았다.

승리감도 잠시, 2017년 또다시 인원 축소를 시도했다. 매년 조합원이 많은 하청업체는 고용승계를 하지 않으려 하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우리는 파업으로 대응했고 투쟁이 길어지자 한국지엠은 하청업체에 외주줬던 공정을 원청으로 ‘인소싱’(회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는 노동조합의 불법파견 진정으로 고용노동부 창원지청이 수시근로감독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업체가 폐업하고 노동자가 해고되어도 노동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비정규직지회의 사활을 건 투쟁이 다시 시작됐다. 인소싱은 정규직 노동조합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행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정규직 노동조합에 연대를 요청했다. 금속노조 44차 대의원대회에서 ‘한국지엠 인소싱 반대 결의’가 통과되었다. 하지만 정규직 노동조합은 금속노조 결의가 무색하게도 나흘 뒤인 12월8일 인소싱에 합의했다.

창원지청은 수시근로감독이 끝났음에도 결과 발표를 미루다가 5개월이 지나서야 창원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776명 전원 불법파견이라며 시정명령을 내렸다. 한국지엠은 당연하게도 행정소송에 돌입했고, 변한 건 없었다. 노동부 위에는 회사가 우뚝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2018년 1월31일 업체가 폐업하면서 해고되었다.

“삼천만원 받고 나가라”

한국지엠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업체 폐업이 지속되면서 많은 조합원이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2019년 또다시 창원공장에서 대량해고가 발생했다. 신차를 생산하기 위한 준비, 즉 공장을 리모델링하기 위해 2교대 근무를 1교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한 것이다. 7개 업체 중 6개 업체가 폐업하면서 12월31일 노동자 565명이 공장 밖으로 쫓겨났다. 궐기대회와 현장순회로 현장을 조직했지만 투쟁은 쉽지 않았다. 이미 절반의 조합원이 해고되었고 더는 파업으로 현장을 멈출 수 없었다. 한국지엠은 삼천만원이라는 위로금을 무기 삼아 마지막 공세를 펼쳤다. 많은 노동자가 공장을 떠나갔다.

한국지엠은 ‘창원공장의 미래를 망친다’ ‘한국지엠의 미래를 위해 신차를 받아야만 한다’는 협박과 ‘해고자를 우선하여 복직시켜주겠다’는 회유로 우리를 압박했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창원공장이 2년 후 2교대로 돌아간다’, 창원시의 ‘일자리를 알아봐 주겠다’ 등 많은 이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희생을 바랐다. 2020년 1월 조합원 투표로 우리는 결국 노노 합의를 했다. 회사가 아닌 정규직노조와 “창원공장 정상운영 시 해고자를 우선 채용을 적극 추진” “대법원 판결 시 즉시 채용 노력” 등에 합의하고 말았다.

2023년 10월26일 창원공장에서 열린 한국지엠3지회투쟁문화제. 필자 제공

늘어지는 판결에 늘어나는 주름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은 대법원 판결만 남은 상황에서 2022년 5월1일 또다시 해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발탁채용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한 이들을 대상으로 사건번호를 적시하고 ‘소취하서’와 다시는 소를 진행하지 않겠다는 ‘부제소합의서’를 전제로 발탁채용을 진행했다. 해고기간이 길어지고 있는 만큼 포기하는 조합원들이 하나둘 늘어가고 있다. 이제 절반도 남지 않았다.

2018년, 2019년 해고로 인해 생계가 어려운 조합원은 생계조합원과 투쟁에 전념하겠다는 투쟁조합원으로 나뉘었다. 생계조합원은 조합비를 납부하는 것으로 노동조합 유지의 한 축으로 투쟁에 함께했다. 현재 9명 조합원이 전면에 나서서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2015년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시작해 소송기간만 9년이다. 2020년 대법원에 상고되었지만 4년 넘도록 결론을 내놓지 않고 있는 대법원의 무책임함에 얼마나 속상한지 모른다. 한달의 절반이 넘는 날들을 서울 거리에서 노숙하는 것도 이제는 익숙하다.

그 투쟁 속에서 나의 정당함을 증명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서러운 날도 많았다. 하지만 당당하게 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으로 의지를 다지면서 지금껏 해고 생활을 하고 있다. 해고 6년, 지금도 우리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추워지는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 공장으로 반드시 돌아가야겠다.

김경학 한국지엠 해고노동자

※이 글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지난해 주최한 ‘13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대상 수상작입니다. 한겨레는 해마다 수상작 일부를 게재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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