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아직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가

임지현 서강대 교수·역사학 2024. 1. 17.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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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노동당 연설… 통일 민족주의, 棺에 못 박아
남이건 북이건 힘 더 강했을 때 상대에게 ‘통일하자’ 큰소리… 김정은 발언은 결국 두려움일 뿐
지금 한반도에서 시급한 건 통일 아닌 평화적 외교 관계다
2023년 12월 3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연설하고 있다./노동신문 뉴스1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가?

북한 지도부의 답변은 결단코 ‘노’이다. 지난 12월 30일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 연설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북 관계가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임을 분명히 했다. 또 조선중앙통신은 ‘민족, 동족이라는 개념’이 북에서 이미 삭제됐다고 천명했다.

놀랍지만 놀랍지 않다. 1990년대 김정일 위원장이 강조한 ‘우리 민족 제일주의’의 민족이 남한을 배제하고 북한만을 가리킨다는 것은 이미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일이다. 민족주의적 미련 때문에 그저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지난 연말 김정은의 공식 연설은 통일 민족주의의 관에 못을 박았다. 현실 정치 관점에서 본다면, 이념과 정치 체제, 사회 구성 원칙과 경제적 삶의 양식이 근본적으로 다른 두 국가를 혈통적 민족의 잣대를 들이대 한데 묶는다는 발상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통일 민족주의자들이 ‘진보’의 고지를 선점하고 또 보수 언론조차 그들을 ‘진보’라고 규정하는 한국의 정치 담론은 답답하다. 통일 민족주의를 위해 다수의 행복을 희생해야 한다면, 그 진보는 일그러진 권력의 장식에 불과하다.

남·북한 지도부에게 민족은 권력 유지를 위한 정치 공학의 쏠쏠한 도구였다.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민족주의의 폭발적 힘 때문에 어느 정치 세력도 통일을 대놓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통일에 대한 남과 북의 입장은 두 국가 사이에서 힘의 균형이 어디로 기우는가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북의 군사력이 남보다 강할 때는 북이 민족 통일을 강조했고, 통일의 명분을 버릴 수 없었던 남은 소극적이었다.

남이 북보다 통일에 적극적으로 된 것은 1990년대 일이었다. 남의 우위가 확실해지자 의사소통이 가능한 북의 값싼 노동력에 대한 기업들의 욕구와, 보수든 진보든 민족주의적 호소력을 간파한 권력의 정치 공학이 통일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공유했다.

반면 북은 계속 움츠러들었다. 1991년 남북 문제를 특수한 민족적 문제라고 정의한 남북기본합의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등장한 북의 ‘우리 민족 제일주의’는 남한을 배제한 북한 민족 제일주의였다.

최근 북이 남의 호칭을 남조선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로 바꾼 것도 예사롭지는 않다. 남과 북은 국제 관계로 보아야 할 별개의 나라임을 천명한 것이다. 통일 민족주의의 미망에서 벗어나 보면, 남북 문제는 하나의 민족 문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체제를 지향하는 국가들 사이의 국제 문제다.

‘흡수통일’을 기조로 하는 한국과는 달리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고 한 데서 통일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두려움은 잘 드러난다. 잇따른 군사적 도발 또한 그런 두려움의 표현일 것이다. 남의 통일 민족주의자들이 갖는 북에 대한 민족적 호의조차 성가실지 모르겠다.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 한반도의 평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통일 민족주의는 민족은 하나라는 허울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허울 때문에 남북의 민족적 정통성 경쟁을 부추기고 오히려 긴장을 고조시켜 왔다. 한국의 국제 관계에서 다른 이웃 국가보다 가장 근접한 이웃인 남북 관계가 가장 경색된 데는 그것도 한 이유가 됐다.

남북이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로운 이웃으로 살려면 국제 관계 원칙에 따라 국교를 수립하고 평양과 서울에 대사관을 개설하는 것이 옳다. 외교적 프로토콜을 따르면, 일본 총리처럼 ‘각하’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괴뢰’라고 칭하지는 못할 것이다.

2024년의 ‘햇볕 정책’은 민족이라는 공허한 표제어를 버리고 군사적 억지력을 견지하면서 우선 남과 북 두 국가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국제 관계를 도모해야 한다. 외교부가 남북 협상의 주역으로 나서서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의 평화적 국제 관계를 구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 외 환경부, 산업부 등 소관 부처마다 북한국, 북한과 등을 두어 가장 근접한 이웃 국가인 북과 국제 협력을 도모하면 될 것이다.

지금 한반도에서 시급한 것은 민족 통일이 아니라 가장 근접한 이웃인 남과 북이 평화적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일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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