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해진 살림에 ‘보험’부터 깼다
지속되는 고금리와 경기 부진으로 서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는 가운데, 보험을 해약하는 규모가 역대 최대로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서민들이 대출 이자를 갚는 것조차 어려워지자, 매월 꾸준히 모아온 보험부터 깨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은퇴 후 생활을 위한 준비 자금이 당장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 투입되는 셈이다.
16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작년 1~10월 국내 생명보험사들이 지급한 해약 환급금과 효력상실 환급금은 38조4357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1~10월 기준으로 역대 최대다. 해약 환급금은 고객이 자의로 보험을 해약하는 경우 지급되는 돈이고, 효력상실 환급금은 고객이 보험료를 내지 않아 자동 해약될 때 환급되는 돈이다. 즉, 자의·타의로 해약된 보험 규모가 가장 커졌다는 것이다.
◇보험 해약, 3년간 3조8000억원 늘어
해약 환급금(효력상실 포함)은 최근 매년 꾸준히 증가 추세다. 2020년 약 34조6000억원이던 것이 3년 만에 3조8000억원(11%)이나 늘어났다. 특히 최근 들어 증가 폭이 가파르다. 2021년엔 연간 증가액이 1400억원 정도였는데, 2022년엔 2조원으로 확 뛰었다. 작년엔 약 1조7000억원 늘었다.
보험을 해약하는 사유는 다양하지만, 최근 대폭 증가한 건 고금리로 금융권 대출 이자를 감당할 수 없는 금융 취약층이 폭증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금리 상승 추이와 환급금 증가 추세가 겹치기 때문이다. 연간 환급금이 2조원이나 증가한 2022년 국내 기준금리는 1년 동안 연 1%에서 연 3.25%로 2.25%포인트 증가했다. 2022년 7월엔 국내에서 첫 ‘빅스텝(한 번에 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이 단행되기도 했다. 그런 만큼 시중 금리도 따라 올랐다.
실제 보험연구원은 작년 6월 ‘최근 보험계약 해지의 특징’ 보고서에서 “경기 부진 및 금리와 물가 변동이 최근 보험계약 해지 증가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설문조사에서도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 생명보험협회가 2021년 전국 2000가구를 상대로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보험 해약 사유로 ‘보험료 내기가 어려워서’를 꼽은 응답자가 32.8%로 가장 많았다. 2위는 ‘목돈이 필요해서’(28.9%)였다.
다만, 최근 보험 해약 증가엔 다른 요인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2022년 10월부터 작년 4월까지 비과세요건(보험 10년 유지)을 충족한 즉시연금 상품의 해지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일부 보험 해지분은 비과세요건을 충족해 세금을 안 내도 되자 해약을 해서 다른 용도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보험 약관 대출도 역대 최대
보험을 실제로 깨지는 않지만, 보험 계약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사람들도 역대급으로 많아졌다. 금융감독원 통계에 따르면, 가계에서 받은 보험계약대출 금액의 최신 집계치(작년 9월 말)는 생명보험·손해보험업계를 합해 약 69조9600억원을 기록했다. 이 역시 사상 최대 규모이고, 1년 전(66조1400억원)보다 3조8200억원 증가한 수치다. 보험계약대출이란 보험 가입자가 보험사로부터 보험 해약 환급금의 50~95%를 한도로 대출받는 것으로, 흔히 ‘약관 대출’이라 불린다.
보험 약관 대출은 2020~2021년 코로나 기간 동안 증가했다가 2022년 초반 다소 감소한 후, 최근 다시 증가하는 추세다. 저금리 시기인 코로나 때는 일종의 ‘호황형 대출’로, 보험 대출을 받아 주식과 가상화폐 등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반면, 최근엔 ‘불황형 대출’로 자금줄이 막혀 어쩔 수 없이 대출받는 경우가 많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보험 계약을 깨면 환급 수수료 때문에 많은 경우 적립금을 다 돌려받지 못하는 문제도 있지만, 은퇴 후 시기를 대비한 돈을 미리 써버리게 된다는 측면도 있다”며 “보험을 중도에 해약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자금 유동성이 더 악화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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